다시보기
<앵커>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8일째를 맞았습니다.
국정원-NLL을 두고 벌어지는 여야간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과거 여야간 대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황태순 /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모시고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1.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며 정부와 날선 대립각을 세웠죠. 당시 경찰이 신민당사에 들이닥친 일도 있었죠?
1-2. 김영삼의 대박정희 투쟁 노선이 온건으로 돌아서게 된 게, 1975년 박정희-김영삼 영수회담 이후입니다. 영수회담이 열리게 된 이유가 뭔가요?
1-3. 영수회담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 하겠다”는 발언에 대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르게 해석했다고요?
1-4. 영수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 건, 두 사람의 가족이 좌익에게 피살당했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 유효했던 것 아닐까요?
1-5. 이 영수회담은 ‘반정부 시위’ 강도를 낮췄다는 점에서 ‘박-김 밀약’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결과적으로 훗날 이 밀약은 깨지고 말죠?
2. 전두환 집권 시기, 김영삼은 5.18사태 3주년을 맞아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죠. 이 때 정부가 강제로 입원시키는 일도 있었다고요?
2-2. 이 단식투쟁을 통해 야당이 얻어낸 성과, 무엇이 있을까요?
3. 1987년, 우리나라에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는데요, 이 과정에서도 여야간 극적인 의견 타결이 있었죠?
3-2. 대통령 직선제 성과를 얻어내는 데는, 여야간 타결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넥타이 부대들이 나선 6.10 항쟁이 핵심 역할을 했죠?
3-3. 직선제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당보다는 야당이 국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땠나요?
4.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시절 여당에 맞서 단식투쟁에 나섰는데요, 어떤 사연인가요?
5. 노무현 정권에서도 치열한 여야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2005년 ‘사학법 갈등’인데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장외투쟁에 나섰죠?
5-2. 결국 여야가 극적으로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김한길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 역할이 컸다고요?
5-3. 박근혜 대통령과 김한길 대표의 입장이 7년만에 뒤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은혜’를 갚을 차례일까요?
5-4. 7년 전 사학법 투쟁과 지금 민주당의 장외투쟁, 명분도 다르지만 흘러가는 양상도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6.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제정된 미디어법 역시 여야 갈등의 불씨였습니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발하며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던 의원들도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