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회사채시장이 '대기업의 신용금고'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들은 싼값에 장기자금을 쉽게 빌려 쓸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된 된 반면, 돈을 빌려주겠다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중견ㆍ중소기업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어서다.
실제로 자금조달시장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주면서 금융사가 요구하는 금리(비용)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다. 1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 3년 만기 'AA-급' 회사채와 'A-급' 회사채 조달금리 차이(스프레드)는 1.005%포인트로 2009년 6월 이후 5년 만에 최대로 벌어졌다.
이는 우량 기업들은 전보다 낮은 금리로 장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지만 중소ㆍ중견기업들은 자금을 빌려쓰는 데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의미다.
최근 회사채시장에서 공기업과 대기업이 발행하는 채권은 없어서 못 파는 상품이 됐다. 수요가 공급을 크게 초과하면서 조달비용(금리)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는 지난해 말 이후부터 공기업 부채 감축 방안으로 공사채 발행이 급감하면서 투자자들이 공사채를 대신해 공사채에 준하는 우량 대기업 회사채를 쓸어담은 영향이 크다. 최근 한국동서발전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기업은 2% 후반대(3년물 기준) 국고채 수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SK그룹 등 대기업 회사채도 3% 초반대 발행금리를 기록하는 등 '초저금리'로 발행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같은 수혜는 AA급과 일부 A급 기업에 그칠 뿐 중소ㆍ중견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 쪽으로는 확산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시장에서 대기 중인 자금들은 대기업 회사채가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한번에 쏟아내는 쏠림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또한 넘치는 투자 수요로 금리를 낮춰 조달비용을 늘리는 일석이조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
회사채시장이 우량 기업 위주로 돌아가면서 건설, 해운 등 자금조달이 시급한 기업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기업어음(CP) 등 단기자금시장을 활용하거나 정부 지원 등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들어 건설사가 공모로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총 9730억원으로 1조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발행건수는 단 7건으로 신용등급이 'AA-급'인 포스코건설(4000억원)과 현대건설(2000억원)을 제외하면 건설사의 회사채 자금조달 성적표는 참담한 수준이다.
올해 건설사의 회사채 총 발행 규모는 LG전자(신용등급 AA) 한 곳이 발행한 것보다 적다. LG전자는 올해 들어서만 회사채를 통해 1조1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해운 업종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 1~5월 해운사의 회사채 만기도래액은 6000억원에 달했지만 공모발행 건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국내 해운업계 수위를 다투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시장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정부의 회사채 차환 지원을 통해 만기 회사채를 상환했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회사채시장이 자본시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태욱 기자 / 전경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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