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손해보험사 최고경영자(CEO)인 B사장은 "한국 보험시장에서 발을 빼려는 외국계 회사가 많다"며 "시중에 돌아다니는 매물만 10여 개 안팎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말했다. 동양생명·ING생명·KDB생명을 비롯한 알려진 매물 말고도 물밑에서 적잖은 딜이 오가고 있다는 얘기다. B사장은 "한국 보험시장이 레드오션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고 덧붙였다.
한국 보험시장이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역사적 저금리에 저출산 여파로 성장동력까지 고갈되자 산업 자체 체력이 크게 약화된 모양새다.
2000년대 초반 연 5% 이상 고금리를 보장하고 팔았던 보험상품이 역사적 저금리 시대를 맞아 수익성을 갉아먹는 부메랑 효과를 내고 있다. 보험사가 자산을 굴려서 내는 '운용자산이익률'이 부채 개념인 '적립이율'보다 낮아 역마진을 보는 현상이 무려 10년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손해보험사 '아킬레스건'인 자동차보험은 15년간 영업적자 상태에 빠져 있다. 지난해 적자만 1조원, 15년간 쌓인 누적적자가 10조원에 달하지만 정부 눈치 때문에 보험료를 올리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2020년 도입 예정인 국제회계기준(IFRS4) 2단계 도입으로 상당수 보험업체가 자본잠식에 빠질 거란 분석까지 나온다.
2002년과 2013년 발생한 보험업계 수난사가 조만간 재발할 거란 얘기다. 2002년에는 1953년 해동화재로 설립돼 2000년 영국 투자금융사 '리젠트퍼시픽그룹'에 인수됐던 50년 역사의 리젠트화재가 청산 절차를 밟았다. 한때 리젠트화재는 납입자본금만 1000억원에 달하는 우량 회사였지만 거듭된 손실에 시달린 리젠트그룹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채 한국 시장에서 손을 털었다. 2013년에는 1947년 국제손해재보험주식회사로 설립돼 66년 역사를 자랑하던 그린손해보험이 누적적자를 못 이기고 주식시장에서 상장폐지됐다. 보험사도 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저축성보험을 비롯해 가입자에게 보험금 대다수를 돌려줘야 하는 보험은 팔아도 아예 매출로 잡지 않는 회계 구조 때문이다. 역마진이 나는 보험을 들고 있으면 이를 부채로 보고 시가로 환산해 재무제표에 반영하기 때문에 과거 고금리를 보장해 팔았던 보험 상당수가 빚으로 돌변한다.
IFRS4 2단계가 도입되면 보험사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인 위험기준자기자본(RBC) 비율이 현재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란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RBC는 보험사가 가진 자본금(가용자본)과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고 가입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돈(요구자본)을 비교한 비율을 의미한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RBC 비율이 200%를 밑도는 보험사는 생보사 25곳 중 3곳, 손보사 31곳 중 14곳에 달한다. 김해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4~5년 뒤 보험시장이 아노미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남식 손해보험협회장은 "시간을 번 만큼 지금부터 제대로 준비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 파리목숨 보험사 CEO…단기 실적에만 급급 경영악화 부채질
보험업계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졌지만 길어봤자 3년인 보험사 최고경영자(CEO)의 제한된 임기 때문에 긴 안목에서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CEO가 바뀐 한국 보험사만 17곳에 달할 정도로 보험업계 CEO는 파리 목숨 자리로 불린다. 보장된 임기(2~3년)를 채우지 못하고 짐을 싸는 사례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생보업계 CEO는 "상당수 보험사 CEO가 명목상 'IFRS4 2단계'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놓고 차일피일 시간만 끌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사 CEO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차피 후배 CEO가 짊어질 짐인데 나까지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오히려 때아닌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3월까지만 하더라도 최저보증이율 3% 중반대를 보장하는 보험상품이 적잖게 판매되고 있었다. 지난달 12일 기준금리가 1.75%로 내려간 걸 감안하면 한동안 기준금리 두 배에 달하는 이율을 보장하는 상품을 팔았다는 얘기다. 당연히 역마진이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역마진이 나는 보험이 많으면 IFRS4 2단계 도입 이후 부채가 급증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해외 글로벌 보험사들은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체제가 자리 잡아 장기적인 안목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구도다.
전용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 기업 악사나 미국 AIG의 CEO는 20년 넘게 장수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5년씩은 임기를 보장받는 데다 강한 이사회 조직이 CEO 독단을 견제하면서 해외 진출 등 굵직한 결정을 주도해 시너지가 난다"고 말했다.
일부 금융지주들이 은행장 경쟁에서 밀린 고위 임원을 소속 보험사 CEO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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