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국제 채권단의 협상 결렬로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그리스와 채권단이 파국을 막기 위한 막판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성과가 없다면 디폴트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지면 물가 급등, 실업 급증, 은행·기업 연쇄 파산, 성장률 급락 등의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디폴트는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탈퇴하는 '그렉시트'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유럽은 물론 전 세계가 그리스 사태 추이를 주목하고 있다.
30일 국제 금융시장에 따르면 그리스의 디폴트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지난 28일 그리스가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을 거부하고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도 내달 5일 국민투표 이후까지 구제금융을 연장해달라는 그리스의 요구를 일축했기 때문이다.
유로그룹이 그리스의 구제금융 연장 요청을 거절함에 따라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이달 30일(현지시간) 끝난다.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그리스가 15억유로(1조 8700억원)에 달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채무를 만기일인 이날 갚을 가능성은 작다.
IMF는 채무 상환 실패를 디폴트가 아닌 '체납(arrears)'으로 규정하지만 시장에서는 IMF 채무 상환 실패를 사실상의 디폴트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이달 30일이 지나도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유동성지원(ELA)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리스 경제는 연명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생명줄과 같은 ELA 자금이 그리스에 공급되지 않는 시점을 실질적인 디폴트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위대 국제금융센터 유럽팀장은 "ELA가 끊기고 난 이후 돌아오는 단기 국채를 그리스 은행들이 상환하지 못했을 때를 공식적인 디폴트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CB는 다음 달 1일 통화정책위원회 회의를 열어 그리스에 대한 ELA 한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앞서 ECB는 지난 28일 ELA 한도를 동결한 바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 주말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한 직후 아테네를 비롯한 전역에서 현금자동출금기(ATM)를 통한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 5억유로(약 6270억원)가 빠져나갔다. 디폴트 위기가 일반 국민들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정부 대변인 등이 은행 문을 닫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국민들의 우려를 진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28일 정부가 금융기관의 예금 인출과 해외거래를 극도로 제한하는 '자본통제'에 돌입하면서 국민들의 삶의 질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고 있다.
그리스가 디폴트에 들어갈 경우, 우선 눈에 띄는 변화는 자본통제 이후의 명목 및 실질 소득의 큰 감소다. 또 1000만 국민 대다수가 실직이나 월급·연금 체불, 투자 손실 등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등 사회 심리적 후유증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직장이 있다해도 월급 삭감에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 음료수, 화학제품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고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면 생활비까지 치솟을 수 있다.
정부가 생필품 품귀 현상 방지를 위해 상점들의 매점매석 행위 등을 집중 단속, 당장 사재기 열풍 등 사회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 저하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은행에서 1인당 하루 60유로(7만5000원)만 인출할 수 있고 해외 계좌 이용이 불가능진다. 4인 가족의 맞벌이 부부 가정은 하루 15만원씩 매달 약 370만원의 예금만 인출, 생활비에 보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가정마다 자녀들의 국내외 교육비와 문화생활 비용 등 생계·의료 등 불요불급 비용의 지출 축소가 불가피해지고 해외 유학 중인 학생들의 귀국 행렬 등도 예상해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은행 등 금융기관이나 여행사 등 서비스 업체 등의 연이은 파산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할 수 있다.
유럽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실업률이 25%, 청년 실업률이 50% 수준이다. CNBC에 따르면 연금이 가계전체를 책임지는 유일 소득원인 18∼34세의 캥거루족 비율도 63.5%에 달한다. 이로 인해 그동안 '긴축 반대' 시위에 가담했던 시민들이 임금 체불이나 연금 지급 중단 등을 비난하며 치프라스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해갈 수 있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파산은 기업 대부분의 줄도산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직종이나 자본금의 대소를 막론하고 기업 대부분이 환율 리스크나 투자 손실, 회수 불능 등 디폴트의 여파로 부도 도미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스의 산업구조를 보면 전통적으로 제조업 기반이 매우 취약한 편이다. 관광, 해상운수 등 3차산업 중심의 생산구조(3차산업 57.2%)여서 대부분 재무 구조가 허약한 편이라 충격을 이겨내기 어려울 전망이다.
주로 선박 운송업과 농수산물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는 기업들도 교역 급감으로, 연간 관광객이 1500만명에 이르는 관광산업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기업 다수가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월급 지급을 못하게 되는 것도 사회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리스 정부는 국세 수입이 예상을 크게 밑도는 상황에서 임금·연금 체불을 면하려면 매달 15억∼17억 유로가 필요하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실직자나 기초 연금 생활자들은 거리로 몰려 나오게 된 상황에서 중산층 시민들도 유로존 잔류 등을 주장하며 시위에 가담하게 되면 정치, 사회적 혼란도 날로 심화될 전망이다.
내달 5일 실시되는 국민투표에서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의 통과 여부와 무관하게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야당 등 반정부 진영의 시위가 격화될 전망이다. 사회적 소요의 잠재적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1년(-8.9%)을 저점으로 해마다 높아졌다.
2012년(-6.6%), 2013년(-3.9%)을 거치면서 경제성장률은 증가했지만 마이너스 성장은 면치 못했다.
그리스 성장률은 2014년(0.8%)에서야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올해 외국계 금융기관 20곳이 전망한 성장률(0.50%)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리스가 올해도 플러스 성장을 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올해 초 2.0%까지 올랐던 전망치 눈높이는 현재 많이 낮아졌다.
문제는 그리스가 디폴트 국면으로 들어가면 플러스 성장을 장담할 수 없다는데 있다.
디폴트로 자금 융통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은 수출품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입 물가는 치솟아 국민의 삶은 피폐해진다.
경제불황 속에 물가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신환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디폴트로 가면 그리스의 성장률은 급락하고 물가는 오르는 국면이 펼쳐질 것"이라며 "그리스 국민은 지금보다 더 강한 긴축을 요구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은 그리스의 디폴트에 이은 그렉시트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고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나가면 유로화 대신 옛 화폐인 드라크마를 재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그렉시트 초반 드라크마의 가치 폭락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최대 50%까지 통화 가치가 평가 절하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과거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뉠 때 슬로바키아는 새 통화를 정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슬로바키아는 통화 가치 폭락과 경제 규모 축소의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IMF는 그리스에서도 드라크마화가 폭락하고 수입 물가는 치솟아 물가 상승률이 35%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소규모라도 무역 결제 자체가 어려워져 수출입은 마비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렉시트로 그리스가 얻는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이탈하면 당장 GDP의 1.8배인 공공부채를 갚지 않아도 되고 통화가치 폭락으로 무역에서 가격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빚을 제대로 갚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뢰도 저하는 그리스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현재
신환종 연구원은 "그렉시트로 제일 손해를 보는 것은 그리스"라며 "그렉시트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그리스 국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로존 탈퇴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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