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모델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만 하던 시절, 단순히 옷 입는 것이 좋고 멋 내는 것이 좋아 패션계에 뛰어들었다는 도신우 회장.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모델이자 국내외 다양한 패션쇼를 진행 및 기획하는 패션업계 최고의 프로듀서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성공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아 래-
Q. 여전히 젊고 활력이 넘치십니다.. 따로 몸매 관리하는 비법이 있으신가요?
비결은 따로 없지만, 평소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엘리베이터도 잘 안 타요. 주말에 가끔 등산도 가고요. 꼭 몸매 관리를 위해서 일부러 무엇을 하는 것은 없고, 그냥 움직이는 게 잘 습관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Q. 모델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때 답답한 교복만 입다가, 대학에 입학하니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옷 입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옷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죠. 항상 가방에 옷을 몇 벌씩 넣고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습니다. 낮에는 학생다운 옷, 저녁엔 좀 더 파격적인 옷으로 말이죠. (웃음) 그렇게 옷을 좋아하다보니, 우연하게도 패션쇼에 서보라는 제안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제안을 해줬던 분이 말하길, 패션쇼에 서면 모델이 입었던 양복을 그냥 준다는 지급해준다는 겁니다. 순간 귀가 솔깃했죠. 당시 맞춤양복 한 벌에 12,000원~15,000원이었는데, 대기업 초봉에 가까운 돈이었거든요. 당장에 하겠다고 했죠.
Q. 사실 당시로 말하면 지금과 달리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가 강한 시대였는데요. 어떻게 모델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을 하셨나요? 주위에서 이상하게 보지 않던가요?
네,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모델이라는 직업이 아예 없었던 시기입니다. 이제 막 태동하려던 시기였죠. 그랬기 때문에 더 도전의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1969년에 ‘왕실모델클럽’을 결성해 남성모델도 이제 하나의 전문 직업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더라도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직업이 좋은 것이라는 걸 어떻게 잘 알릴 수 있을까에 대해 더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하면서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는 저를 빼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해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한 셈이죠. 그래도 저는 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제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변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Q. 특히 1969년에 결성한 ‘왕실모델클럽’은 남성모델을 최초로 직업화, 전문화시켰다는 점에서 모델 역사 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던데요. 요즘같이 모델이란 직업이 선망 받는 대상이 되고,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제가 모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모델’을 직업화, 전문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토양을 잘 만들어놨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의 모델들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뿌듯합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 모델들이 국제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후견인 역할이겠죠. 더 좋은 조건 속에서, 더 좋은 토양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모델계 선배로서, 또 패션쇼 사업에 종사하는 CEO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어요.
Q. 그렇다면 모델에서 연출자로 삶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73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 15회 주문복 업자 연맹회의 패션쇼’에 제가 한국 대표 모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패션쇼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모델이라는 직업도 선망 받고, 존경 받는 직업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어요.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패션 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음악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당시 한국의 모습만 상상해보더라도 무엇이든지 모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거든요. 헤어, 메이크업도 자신이 직접 해야 했고, 옷을 챙기는 것도, 패션쇼 순서를 짜는 것도 모두 모델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패션쇼는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시스템이었습니다. 모델은 무대에 서는 것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 있었고, 연출자는 디자이너와 협의하면서 패션쇼의 전체적인 기획과 진행을 해나가는...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시스템이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철저히 세분화, 전문화, 체계화되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우리나라도 바뀌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라 연출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해외도 나가면서요. 약 10년 정도는 모델로서, 그리고 연출자로서 활동을 하다가 1984년에 들어서야 지금의 모델센터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Q. 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모델 오디션 제도라는 것도 최초로 도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만 해도 패션쇼가 하나 열린다고 하면 옷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옷을 고르는 방법이 가관이었습니다. 선배가 가장 많은 옷을 입고, 또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을 입는 게 당연시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항상 후배들은 남는 옷만 입어야 했죠. 이러한 불합리한 관행을 고칠 필요가 있겠다 싶어 모델 오디션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각각의 옷에는 그에 맞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 분위기에 맞게 모델을 선발한다는 것이 모델 오디션 제도의 핵심이었습니다. 기회를 균등하게, 과정을 공정하게 한다고 했지만, 자기 밥그릇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몇몇 모델들은 굉장히 반발을 하고 나섰습니다. 아예 집단으로 제 사무실에 찾아와선 항의를 하고, 반 협박조로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모델들도 있었죠. 하지만 이러한 갈등들은 패션업계가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극복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했고, 한 명씩 일일이 면담하고 설득해가면서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습니다. 어쨌든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 속에서 모델들이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Q. 앙드레김 선생님과도 30년 지기 사업 파트너셨죠? 기억에 남는 패션쇼가 있다면?
앙드레김 선생님 패션쇼를 꾸준히 맡아오면서 좋은 파트너십을 유지했었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199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피라밋 & 스핑크스’란 주제로 패션쇼를 한 것입니다. 피라미드 앞에서 패션쇼를 연 것이었는데요. 피라미드 앞에서의 패션쇼라니.. 정말 아름답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저에게도 그 패션쇼는 소름이 끼치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당시 영부인이었던 수잔 무바라크 여사 또한 저희 패션쇼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했습니다. 패션쇼를 잘 개최했다는 것에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예술적으로 굉장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 못할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이 한국과 이집트의 수교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Q. 연출자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직업인데요. 새로운 생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우선 디자이너와 대화를 많이 나눕니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거기에 맞는 모델 선정이라든가, 음악 선곡, 무대 세팅, 조명 설치, 장소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갑자기 번뜩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숱한 고민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게 제 노하우라면 노하우입니다.
Q. 화려하게만 보이는 패션쇼지만, 그 속에 위기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IMF 때죠. 그때 제가 정말 ‘도미노’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1년 전에 잡혀있던 패션쇼부터 시작해서 우르르 다 취소가 되더라고요. 암담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더 암담했던 것은 IMF는 제 힘으로 어떻게 타파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패션 브랜드 관계자들이나 디자이너들이 패션쇼를 열어야 제 사업이 굴러가는 것인데, 패션 브랜드가 파산하고 없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때 당시는 패션쇼는커녕 브랜드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때 없어진 브랜드들도 꽤 많았습니다. 어쨌든 그 IMF라는 위기를 빠져나오는 데 꼬박 3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 개인적인 자산을 쏟아 붓고, 주위에 도움도 요청하고...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Q. 그런 위기를 어쨌든 잘 버텨내셨기에 지금의 회장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0년 동안 모델, 패션쇼라는 영역 속에서 한길을 걸어오셨는데요. 앞으로의 계획,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패션쇼를 전용으로 하는, 패션쇼 전용 공간... 패션쇼 전용 극장이라고 할까요. 난타극장이 생긴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게 하나 있어서 늘 1년 365일 항상 그 장소에서 패션쇼를 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패션업계가 워낙 경기불황에 직격탄을 받는 업종이잖아요. 모델들에게도 안정적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잖아요. 또 그 공간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쇼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무궁무진한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그게 꿈이라면 꿈이고.. 그리고 모델들이 세계무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젊고 유능한 디자이너 분들도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제가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Q. 모든 사람들이 모델이란 직업을 두고 ‘아니오’라고 할 때 나 홀로 꿋꿋하게 모델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그래서 이제는 연출자로서, CEO로서 자리매김 하고 계시고요.. 오늘도 열심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았다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