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문]
▶얼마 전에 좋은 소식 있으셨잖아요.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덤덤해요. 오히려 더 무겁죠. 짐을 짊어진 것 같아요. 첫째는 우리 선생님한테 좀 그렇고요.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김소희 선생님 맞으십니까?
-춘향가를 하게 돼서 문화재로 지정받았으니까 열심히 제자들 가르치고 후학들에게 좋은 소리를 가르치는 것이 저의 의무고요. 또 하나는 학생들이에요. 32년 된 학생들도 있어요. 저한테 온 제자들이 아무데도 안 가고 그저 저만 바라보고 32년, 30년, 25년, 제일 적은 사람이 10년이에요. 그동안 이 제자들한테도 면목이 없었어요.
▶왜요?
-이수를 시켜야 되는데 이수를 못시키니까요. 사실 실력은 내려두고라도 어찌됐던 이수를 시켜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서 사실 가슴이 아팠어요.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니까 그랬던 거군요.
-중요문화재 조교로 있으니까 그랬는데요. 짐이 무거워졌고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제자들한테 소리도 잘 가르쳐야 되지만 인성, 인격공부도 잘 가르쳐야 되는데 걱정입니다.
▶소리인생 60년이라고 합니다.
-올해 61년째 됐습니다.
▶무형문화재 지정받을 때 60년 이상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조금 더 빨리 받으신 분도 있어요. 저는 실력이 없어서 못하니까 그랬겠죠. 그렇게 저는 생각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기준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거의 큰 제자가 하게 되어있죠. 실력을 갖추고 자기의 모든 사생활이 건전해야죠.
▶사생활까지도 다 검증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단 교육자이잖아요.
▶문화재청에서요?
-그렇죠. 교육자 입장에서 사생활이 그러면 안 좋죠.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을 너무 많이 탄 것도 있었고요. 쓰리랑 부부라는 타이틀 때문에 조금 그런 것도 있었죠. 저를 아끼는 분들이 안했으면 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고집부리면서 그 역할을 했어요. 거기서 오는 영향도 있었고요.
▶질문에는 원래 없는 부분이지만 사생활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문화재청에서 조사하나요?
-다합니다. 다 알죠.
▶평판 조사도 하고?
-그렇죠.
▶나쁜 소문이 있어서도 안 되고?
-그렇죠. 그래서 예고기간을 한 달간 두죠.
▶한 달간 예고기간도 두고?
-네. 그리고 저는 한 달이 넘고 두 달 넘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새 정부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조금 그랬잖아요. 그래서 멈칫 하다가 3월 14일 날 확정이 된 거죠. 그동안에는 꼼짝 안하고요. 조금이라도 잡음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평소 생활을 건전하게 해야 되겠죠.
▶사생활 문제로 탈락한 국악인도 그동안 계셨어요?
-그동안은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렇고 그래서는 안 되겠죠. 교육하는 입장이니까요.
▶60년 동안의 사생활 검증까지 거친다고 하면 청문회 보다 더 힘든 건데요.
-청문회는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지만 이것은 선천적으로 안 타고나면 안 되고 노력안하면 안되고 후천적으로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인생 스토리를 제가 묻고 싶습니다. 원래 아버님이 판소리 명창이시잖아요?
-소리하셨습니다. 소리꾼이셨어요.
▶신선자 선생도 정말 유명하신 소리꾼이신데 아버님의 자제분이 선생님까지 몇 분이시죠?
-2남 2녀에서 저는 셋째예요.
▶그 중에서 선생님처럼 판소리를 하시는 다른 형제가 있으신가요?
-오빠는 교육계로 가셨다가 퇴직하시고 지금 아산에서 국악을 하고 계세요. 오빠는 소리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가야금, 거문고, 사물놀이 하고 계시고요. 저희 언니는 일찍 시집을 가셨고 전혀 국악과는 멀고요. 저희 동생이 어렸을 때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북을 잘 쳤어요. 3살, 4살 때 잘 쳤어요. 학교 다니면서 그만 두었다가 삼십 몇 년 전에 저하고 같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를 하셨는데 제가 듣기로는 10살 때부터요.
-11살 가을부터 했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다른 형제는 안 가르쳐주시고 신 선생님만 판소리를 가르쳐주셨습니까?
-제자들을 가르쳐 주시는데 제가 뛰어 들어갔죠. 학교 갔다 와서요. 그때는 보자기에 싸서 여자들은 허리에 매고 다녔거든요. 부성애라고 할까요. 너무 애를 녹이니까 밖에서 듣다가 그것도 못하냐고 해서 뛰어 들어갔죠. 뛰어 들어가서 한번 해봐라 해서 한번 해봤더니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셔요.
▶왜요?
-하면 안 되잖아요. 이 생활이 너무 힘들고 여자가 할 소리는 아니에요. 원래 남자들이 판소리를 했죠.
▶그 당시에는 남자들이 주로 했었잖아요.
-옛날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지만 협률사라는 단체에서도 남자들이 다 소리를 하고 여자들은 민요를 주로 불렀죠.
▶선생님이 시작하셨을 때 판소리로 유명했던 여자 분은 없으셨겠네요?
-계시긴 계셨죠. 그렇게 두각을 못 나타내셨죠. 박초월 선생님이라든지 저희 김소희 선생님, 박녹주 선생님 등이 계셨어요. 계셨어도 두각을 못 나타내고 63년도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거죠. 지금 대통령 아버님 되시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문화재로 해야 된다 그래서 63년도에 지정됐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에 최초로? 50년 전이네요.
-그때 문화재로 지정한 거예요.
▶부성애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소리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기에 딸에게 안 시키려고 하셨을까요. 그 당시에 뭐 때문에 힘들었던 건가요?
-힘이 너무 들잖아요. 긴 터널이에요. 소리 공부하면서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그 당시 소리하신 분들은 먹고 사는 건 지장 없으셨나요?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어요. 어머님이 진도 홍주 내리는 기술자예요. 진도 홍주를 불 때워서 삼 일 사흘 하면 옹기그릇에 하나 나와요. 이것을 아버지 친구들, 그 당시 면장 분들한테 팔아서 생계유지는 했어요.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제가 듣기로는 아파서 약 대신에 전라도 말로 거시기 한 걸 드셨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이죠. 목이 열네 살 때 쉬어서 안 나와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제 별명이 유달산 다람쥐였어요. 새벽에 막 뛰어올라가 유성각 밑에 굴 하나 있는데서 소리를 두 시간 하고 내려와서 밥 먹고 또 하고. 점심 먹고 하고. 학교는 앞으로 갔다 뒤로 나와 버리고요. 그때는 퇴학도 없었어요. 6.25가 나고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학생 수가 적으니까 퇴학을 안 시켰어요. 그래서 소리만 하는데 너무 어린 여린 몸에 옛날에 제가 48키로 나갔어요. 그랬을 때 이런 데가 아파요. 어혈 때문에 인분을 많이 먹었습니다.
▶정말 많이 드셨어요?
-많이 먹었어요. 한 1년.
▶효과가 있던가요?
-그걸 먹으면 효과가 나요. 물을 마시는 거죠.
▶다른 판소리 하시는 분들도 일종의 민간요법인데요.
-민간요법이죠. 옛날 분들은 잡수시는 분들 많았어요.
▶효과는 보신건가요?
-열이 올라오면서 어혈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안 생계도 많이 책임지시고요. 오빠 대학까지 보내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가족 중에 능력 있는 사람이 벌어서 식구를 먹여 살리고 학교를 가르치고요. 저는 교육열이 굉장했어요. 나는 학교 못 다녀도 오빠는 다녀야 된다. 당시엔 아들들이 3~4명이 됐으니까. 여자는 안 배워도 남자는 배워야 된다는 마음이었어요. 저는 소리를 하니까 오빠가 배워야 된다고 그랬죠.
▶우리 신영희 선생님은 국악사에도 기록이 되겠지만 굉장히 큰 업적 중에 하나가 국악의 대중화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신 분이 아닌가 싶어요.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 김미화 씨가 출연하신 쓰리랑 부부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 전에는 KBS 지정석이라고 해서 창극을 많이 했어요. 따분하다고 잘 안 봐요. 섭외가 들어왔는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고루한 성격을 갖지 말래요. 앉아서 좋다, 좋다 하면 누가 알아 주냐는 거예요. 상품화시키고 들려주고 보여주고 국민들한테 그래서 좋은 것 인줄 알게끔 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87년부터 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아리랑 남매였어요. 아리랑 남매가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 쓰리랑 부부로 하자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굉장한 인기프로그램이 됐죠.
▶아마 선생님이 뒤에서 판소리로 맛깔스럽게 해주시니까.
-둘이만 한 게 아니고 우리나라 전통 문화를 같이 하니까 88올림픽 때 사진 찍으러 오고 난리 났었어요. 가장 인기 있는 대한민국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냐. 쇼 비디오자키에 쓰리랑 부부다. 남자들도 좋아하고 남녀 노소할 것 없이 남자가 잘못하면 남자한테 뭐라 하고 여자가 잘못하면 여자한테 뭐라 하고 감초역할을 했던 거죠. 그래서 더불어 저도 부각이 되어 스타 아닌 스타가 된 거죠.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셨을 것 같아요. 저만 해도 95년도에 변호사로써 최초로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제 친구들이 전부 미쳤냐고 말렸거든요. 돈이 아쉬워, 명예가 아쉬워 왜 나가서 망가지려고 하느냐는 거죠. 저 때문에 창피하다고 친구들이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그 친구들이 방송 못나가서 나중에 섭섭해 하더라고요. 지금은 후회 안하시죠?
-지금은 시켜도 못해요.
▶지금 공연 장면도 나오고 있는데요. 외국도 많이 다니시고 계시는데. 이 장면이 어디였던 걸로 기억하세요?
-모르겠어요. 너무 많아서 어디였는지 모르겠는데요.
▶저희는 미국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말로 치면 열변을 토하시는 건데. 그때 뭐라고 그러나요? 강의를 잘하면 열강이라고 그러는데 판소리는 열창이라고 그러나요?
-지금은 앵콜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제창이라고 그랬어요.
▶요즘 한류 열풍이 불었는데 요즘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뜨고 K팝이라고 해서 아이돌 전 세계 열풍이 불고 있는데 국악은 아직 열풍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열풍이 불겠습니까?
-다시 가라앉았는데. 그러나 우리의 뿌리를 없앨 순 없죠. 뿌리는 그냥 가는거예요. 어느 날 기폭이 심해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고 걱정 안 해요. 요즘 젊은 후학들은 소리를 너무 잘해요. 소리뿐만 아니라 악기도 잘하고 무용도 잘해서 앞일은 밝고 걱정 안 해요. 젊은 사람들이 잘해서요.
▶태권도는 도장들이 전 세계에 생겨서 올림픽 종목이 되기도 했는데 판소리 같은 경우도 학원이나 배움터가 많이 생기고 있나요?
-한국에도 많지만 LA에도 있고 뉴욕에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지부를 낼 생각은 없으시고요?
-지부가 있습니다.
▶어디에?
-국악협회에 지부가 있습니다. 올해도 일요일날 LA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못 갔어요.
▶외국인 제자도 양성하고 계세요?
-있죠.
▶어느 나라 사람이 판소리를 배우러 많이 옵니까?
-일본 사람도 있고, 미국도 사람도 있습니다.
▶그 분들은 인생을 걸겠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나요?
-그런 분들은 안계시죠. 안되죠.
▶취미로?
-말을 더듬는 분들이 말을 하면 더듬는데 소리는 안 더듬어요.
▶지금 후배도 많이 기르고 계시고 배출하고 계시는데. 지금까지 배우고 있는 분들까지 해서 후배 중에 몇 분이나 배출이 되었나요?
-헤아릴 수 없죠. 그러나 거기서 빼어난 인재들, 소리꾼들이 대통령상 받은 제자들이 8명 됩니다. 최고로 많지 않을까싶어요. 한번 오면 어디로 안 나가요.
▶10년, 30년 동안 계신다고 하니까.
-30년.
▶정말 대단하신데. 지금 제자들을 보니까 젊은 분들도 꽤 많이 배우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화면에서 나오는 몸동작은 뭐라고 부르나요?
-발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배워야 되는 거고요.
-그럼요. 소리의 이면에 맞게 가사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의외로 젊은 분들이 많아요. 지금 화면에 나오는 하늘색 옷 입으신 분은 몇 년이나 되신건 가요?
-15년, 20년. 작년에 60년 소리인생 연습할 때인데요.
▶김소희 선생님한테는 몇 년이나 사사 하신 거예요?
-75년도에 와서 95년도까지. 95년도에 돌아가셨어요. 20년 동안 했다고 봐야죠.
▶엄청나네요. 선생님도 20년간 사사하시고. 그전에도 당대 대가들한테 많이..
-일곱, 여덟 분한테 배웠죠. 당대 내놓으라는 선생님들한테요.
▶지금 연예인들은 인기도 많고 돈 버는데도 좋은 직업이 되었어요. 연예인 같은 경우는 옛날에도 밤무대에 나가야지 먹고 살고 탤런트들도 배가 고픈 시절들이 있었는데 판소리하시는 분들은 옛날하고 지금이랑 그런 면에서 어떠신가요?
-다 바쁘게 돌아갑니다. 자치제가 돼서 지방 국립 무용단, 국립 시립 무용단, 시립 극단, 도립 극단 국악당이 있어서 배출되고요 잘하는 특정인들은 바빠요.
▶다시 말하면 배가 고파서 그만두겠다는 경우는 줄어들었다는 말씀이시죠?
-어려운 소리는 배가 고프면 안 되요. 가난해야 되요. 할 의욕이 안 생겨요.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60년 소리 인생을 사시면서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없으셨어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고개 돌렸을 때. 저희들을 몰라주고 우리 음악을 전통으로 몰라줄 때는 하기 싫더라고요. 차라리 콩나물 장사라도 하던지 차라리 그런 생각들도 했어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신 박동진 선생님이 국민들한테 각인되셨던 것 같아요.
-87년도부터 해서 90년까지 쓰리랑 부부를 했잖아요. 세인들 귀와 눈에 저렇게 재밌다 했을 때 92년도에 나온 서편제가 한몫 해줬어요. 한참 있다가 95년 96년도에 박동진 선생님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그때부터 우리 국악이 굉장히 많이 저변이 되었죠.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하는 카피가 우리 국민들한테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은 걱정이 없으시잖아요?
-제 걱정이 아니라 우리 후배들이 걱정되죠.
▶정부가 전통음악인 국악을 양성할 때 아쉽다 하는 면이 있으신가요? 정부가 이것은 좀 해줬으면 좋겠다.
-많이 있죠.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매스컴입니다. 무섭고 좋은 것이. 매스컴에서 많이TV에서건 라디오에서건 많이 보여주고 국민들이 볼 때 재밌다,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하고 느낄 정도로 방송국마다 국악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바람이 있다면.
▶우리 신 선생님을 보면 건강하시고 자신만만하시고 열정적으로 사시는 분이셔서 걱정이 없으실 것 같아요.
-지금도 아침마다 40분씩 스트레칭을 합니다.
▶살아오면서 라이벌이라고 느끼신 분들은 안계셨어요?
-선배들이 많고 저희 또래들이 없어요. 그 밑에는 전부 후배들. 우리 형님들이 자네는 또래가 없어서 외롭지 하는데. 지금 현재 국악협회 이사장 홍성덕이 우리 또래고. 그러나 그 분은 소리를 안 해요. 오갑순 씨하고 한두 살 차이고요.
▶라이벌이 문제가 아니고 외롭다. 그러나 후배는 많이 양성하니까.
-우후죽순처럼 커 나오니까 재밌죠.
▶이런 말씀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습니다. 소리꾼은 득음을 향해서 일생동안 나아간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들었는데.
-득음이라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어요. 옛날 8대 명창, 5대 명창 같은 선생님들 중에서도 득음하신 분들은 두서너 분밖에 안계세요. 득음의 길로 가면서 우리가 노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공부해요. 제자를 가르치면서 지금도 공부하고. 득음의 길로 가면서 생이 끝나는 거죠.
▶남들이 봤을 때 신 선생님의 득음은 벌써 열 번은 하셨을 것 같은데.
▶정말 겸손하시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으니까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후배 양성도 있고 국악발전과 세계화 역할에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