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래-
Q.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신다면?
집에서도 장남이었고 성격이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을 좋아해서 늘 리더 역할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특히나 예체능 쪽에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하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미래에는 내 손재주를 살린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때마침 큰 아버지가 하시는 구두 공장을 방문하게 됐어요. 구두 공장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구두를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순간 ‘이거다!’ 싶었죠. 구두를 만드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꿈은 ‘구두 공장 사장님’이 되었고 곧장 큰 아버지 구두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Q.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허드렛일이었죠. 어린 나이었고 무엇이든 시키면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청소면 청소.. 잔심부름 등등을 하면서도 어깨너머로 틈틈이 가죽을 가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어떻게 가죽이 구두로 다시 탄생하는지 메모를 하면서 보기도 나만의 구두 디자인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다들 퇴근을 한 후 텅 빈 공장에서 혼자 남아 연습도 해보고요. 그렇게 한 1년 정도를 보낸 것 같네요.
Q. 일하면서 쌓은 경험이 또 어떤 일들로 이어졌나요?
판매직에 뛰어들었습니다. 구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익혔으니 이런 구두들이 어떻게 판매가 되는지 경험해 보고 싶어서였죠. 당시 구두 매장이 밀집되어 있던 명동의 한 구두 매장에 취업하고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구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봐와서 그런지 고객들이 원하는 디자인과 발이 편안하도록 할 수 있는 구두를 맞춤 제작해줄 수 있었습니다. 고객들도 주문한 구두를 신어보고 많이 만족해하셨죠. 그래서 그런지 제가 명동에서 ‘좋은 구두’를 파는 남자로 소문이 나서 저에게 구두를 주문하는 고객이 늘어났어요. 다른 직원들 보다 두 배, 세 배 많은 구두를 팔았습니다. 이렇게 입소문이 나니 일본에 가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았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Q. 일본에서 어떤 것들을 배우셨나요?
가죽가방과 구두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당시만 해도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패션에서는 많이 앞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패션업계 조직 구조 자체도 우리나라보다 좀 더 체계적이었다고 할까요? 배우는 자세로 초심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위에서 내려오는 주문대로 가방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구두를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조직의 특성상 위에서 시키는 일 위주로만 하다 보니 개개인의 창의성이 많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배운 것도 참 많고 실력을 많이 늘려준 일본이었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Q. 창업을 하시게 된 것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 거의 바로 ‘휘권양행’이라는 작은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일본 회사에 있을 때 인맥을 활용해 OEM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기도 했었고 생각보다 주문을 많이 해서 작은 공장이었지만 매출이 꽤 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IMF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과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별 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몰려드는 주문량 때문에 더 큰 공장으로 이전을 하고 직원의 수도 늘리게 되었습니다. 승승장구 하면서 공장 문을 연지 약 5년 만에 무려 40억 원이라는 매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OEM이 아닌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호미가’라는 브랜드를 직접 만들게 되었습니다.
Q. 처음에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처음 제 브랜드가 부착 된 가방을 일본 판매처에 입점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산’은 잘 팔리지 않고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된 가방을 만들어서 꼭 일본에 입점 시키겠다는 각오로 시장 조사를 했어요. 그 결과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이 굉장히 희소성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악어가방’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희소성 있는 만큼 ‘악어가죽’ 한 장의 가격이 엄청났었는데 OEM으로 벌어 놓은 돈으로 가죽을 들여와 직접 만들어보기 시작했습니다.
Q. 사업을 하시면서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악어가방’을 연구하던 순간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당시 악어가죽 한 장이 50만 원 정도였는데 하루에 15장은 가방을 만들다가 망친 것 같아요. 그런데도 OEM하면서 벌어 놓은 돈이 있으니 계속해서 신경 쓰지 않고 도전을 했죠. 워낙에 다루기 까다로운 가죽이여서 쉽게 성공하지 못했고 그렇게 몇 년은 돈을 투자하기만 했어요. 벌어놓은 돈은 점점 줄고 결국 돈이 바닥을 보일 때 쯤 정신이 차려지더라고요. 악어가죽을 다루는 장인들도 찾아가 보고 노력에 노력을 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고 심기일전한 끝에 남은 돈으로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Q.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셨나요?
간절함. 구구절절함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돈이 많을 땐 위기 의식 없이 마구잡이로 돈을 쓰며 연구했지만 돈이 어느 정도 한정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성공해야 한다는, 그 간절함이 더해지니 가방이 곧 완성되더군요. 하지만 가방이 완성 되었을 땐 이제 재산이 없는 상태였고 어디든 입점을 해야 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국산 명품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Q. 그렇다면 판매의 물꼬를 튼 것은?
제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 청담동에 매장을 차렸습니다. 백화점에서 받아주지 않으니, 제가 스스로 매장을 차렸죠. 그리고 해외 명품 브랜드와는 다른 차별화를 세웠습니다. 첫 번째로 가격이었습니다.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아시다시피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관세나 부가세 등이 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미가’는 이런 가격의 거품을 완전히 빼서 해외 명품 브랜드의 품질에는 뒤지지 않지만 가격은 저렴하게 차별화를 했습니다. 또 사후 관리 서비스를 최대한 빠르게, 무상 수리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피를 확보하고 있어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가방을 만들어 드릴 수 있다는 장점으로 어필했습니다. 이런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 나갔고 가방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처음엔 입점을 거부하던 백화점에서 입점을 해달라고 먼저 찾아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현재는 청담동 매장을 닫고 21개의 백화점에 입점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Q.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해외 명품 브랜드가 좋다는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