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쾌대 사진 |
36년의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1945년 8월. 서른줄에 접어든 청년 작가 이쾌대(1913~1965)는 펜을 들어 선배 화가인 진환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해방의 감격에 고무된 한편 민족 미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짧은 편지에 역력히 묻어난다.
이 결연한 태도는 유화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 속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화가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한다. 새 시대를 맞은 화가의 패기 넘치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엿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청년 작가 이쾌대의 운명도 ‘월북 작가’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비극적으로 치달았다.
20세기 근대 미술의 거장 이쾌대의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전시명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이다. 올해 광복 70주년, 타계 50주년을 맞아 시대의 군상을 장대하게 그린 이쾌대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취지다. 대표작 ‘해방고지’(1948)와 ‘군상’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등 대표작을 비롯해 미공개 드로잉과 아카이브 등 400여점을 소개한다. ‘사랑’과 ‘전통’ ‘시대’라는 키워드로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대표작 ‘군상’ 넉점이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격변기를 화폭에 담은 들라클루아나 제리코처럼 이쾌대는 2m가 넘는 캔버스에 군상들의 환희와 절규를 담아낸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좌우가 대립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방향을 잃은 채 허우적거리는 민중을 묘사한 것이다. 1948년 제작된 ‘군상I-해방고지’와 ‘군상IV’ 뿐 아니라 유화 150여점은 모두 유족의 소장품이다. 동시대 작가 이중섭과 박수근이 가난에 시름하며 은지화와 종이, 작은 캔버스에 그렸던 것을 떠올리면 이쾌대의 작업 환경이 얼마나 풍유로웠는지 에둘러 알 수 있다.
그는 야구선수가 꿈이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화업을 택한 모던보이였다. 1913년 경북 칠곡의 만석꾼 막내 아들로 태어나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했으며 일본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화폭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부인도 세련된 미모의 신여성이었다.
6.25가 발발했을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게 됐고,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친형의 월북으로 가족과 떨어진 채 북한에 간 것이 비극의 단초였다.
이번 전시는 1953년 월북 전까지 그렸던 대표작들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북한에서 12년간 그림을 그려 많은 작품이 북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지만 작품성이 더 뛰어난 것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북에서 그린 그림의 진위 논란도 거쳐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1930~40년대 한국 화단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지만 월북으로 한때 금기 작가가 되고, 북한에서도 주체사상이 대두하며 이름 석자가 지워진 이쾌대. 복권이 이뤄진 것은 1988년이었고 그 때부터 재조명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이 작지 않다. 역대 최대 규모의 이번 회고전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서양 미술을 그가 얼마만큼 자유자재로 습득했는지,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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