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연극 ‘만리향’의 무대는 독특하다. 세월의 때가 묻은 메뉴판하며, 투박한 식탁, 그리고 실제로 시골 중국집에서 본 듯한 가게에 딸린 작은 방과 그리고 그곳을 채우는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극중 주된 배경이 되는 중국집의 풍경을 완벽 재현한 것이다. 햇양파 섞인 춘장냄새만 난다면, ‘만리향’이라는 이름의 중국집에 찾아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이다.
‘만리향’은 도시 외곽의 중국음식점 만리향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때는 방송사 맛집으로 선정되면서 많은 손님들이 찾았던 중국집 만리향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첫째 아들이 주방을 이어받으면서 파리만 들끓는 곳으로 전락한다. 계속되는 악재 속 유도선수인 셋째 딸 마저 운동도 그만두고 배달 일을 도우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꼴통 취급 받던 둘째 아들은 가출을 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적장애가 있던 막내마저 실종된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장 보러 나간 어머니가 시장에서 막내를 목격했다고 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작도 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연극을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만리향’이라는 이름의 중국집에 온 것인지 혼란에 빠져들게 한 ‘만리향’은 평범한 중국집이라는 배경처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 역시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무뚝뚝하고 자존심이 강한 장남, 입으로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속정 많은 깊은 둘째 아들, 오빠들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바쁜 셋째, 그리고 애달픈 마음으로 실종된 막내딸을 기다리는 엄마까지. 가짜 굿판을 준비하면서 숨겨진 가족사가 드러나기도 하고, 가슴 속 깊이 감췄던 상처들이 툭툭 터지기도 하지만, 이를 자극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덤덤하게 풀어나간다.
2014년 34회 서울연극제에서 4개 부문(대상, 연출상, 신인연기상, 희곡상)을 수상했던 작품인 만큼 ‘만리향’은 얼개가 탄탄한 대본과 단편드라마를 보는 듯 꼼꼼한 연출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과장함 없이 평범한 중국집의 일상을 그리는 ‘만리향’은 형제들의 다툼 속 유치하지만 형제가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을 대사들과 생활 밀착형 코미디로 웃음을 자아낸다. 남매의 간곡한 부탁에 ‘보험가입’을 빌미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가짜 굿을 펼치는 유숙이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티격태격 하는 세 남매의 모습은 실제 형제자매들의 사소한 말다툼처럼 공감이 가득하다.
진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가짜 굿이라는 사실은 극중 인물들도, 관객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가짜 무당이 된 유숙이 방울을 흔드는 순간, 실제 씻김굿의 풍경을 보듯 속 쉬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지나치게 평범하기에 특별한 ‘만리향’의 정범철 연출은 “‘만리향’이라는 작품의 성격은 사실주의에 가깝다. 개인적으로 미니멀한 무대를 좋아하지만,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리향’만큼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무대에서부터 작은 소품까지 사실적으로 가야 전체적인 밸런스가 맞겠다고 생각했다”며 연출의 방향성에 대해 설명했다.
한편 ‘만리향’은 오는 20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공연된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