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시인의 눈빛은 공허하다. 얼굴에 하얀분칠을 하고 입술은 빨갛다. 슬픈 광대가 된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해 이솝 우화를 번역했다. 주인이 이솝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물건을 가져오너라”고 말하자 짐승의 혀를 많이 가져다줬다. 이솝은 “세상의 모든 언짢은 일들이 다 이 조그만 혀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가장 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글마저 북한 체제에 대한 야유와 조롱으로 읽혀지고 시인은 영원히 삼수갑산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다.
연극 ‘백석우화’는 휴전선 너머에 살았던 북한 천재 시인 백석(1912~1996)을 대학로 게릴라극장 무대 위에 부활시켰다. 문학과 북한 사상의 충돌 속에서 핍박받았던 그는 이솝우화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발표한 후 쫓겨났다. 1962년 이후 북한 당국은 백석 작품을 모두 수거해 폐기처분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시인은 놀랍게도 84세까지 모진 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1995년 여름 삼수군 농장에서 찍은 백석의 가족사진이 연극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는 단 하루도 시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 쓴 시는 불쏘시개로 태워 저 하늘로 올려 보내 놓았다고···.
시대와 불화했지만 그의 최후는 그다지 불행해보이지 않았다. 가족이 곁을 지켜줬고 그의 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북한 시인이지만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남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연극에서 나타샤의 정체를 찾으면서 백석의 연애사도 속살을 드러낸다. 첫눈에 반해 동거했던 기생 자야(김영한)와 사랑이 펼쳐지고 백석의 친구 신현중 아내가 되어버린 박경련, 소설가 최정희도 스쳐지나간다. 세번째 아내이자 피아니스트 문경옥이 김일성을 찬양하는 쇼팽 ‘혁명’을 연주하자 백석은 절망에 빠져든다. 쓸쓸하게 파를 다듬으면서 자작시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노래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
남한 시인들을 열등감에 빠뜨렸다는 백석의 대표시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조선의 모던보이,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살려냈던 시인은 광복 후 고향인 평안도에 정착하면서 남쪽에서 읽기를 거부당했다.
친일을 거부하기 위해 한 때 절필했던 시인은 북에서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시를 쓰지 않기 위해 번역과 동요시에 몰두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투철하지 못한 부르주아로 몰려 농장으로 유폐됐다.
감자를 거꾸로 심고 양들을 다 잃어버리는 엉터리 농사꾼이었지만 그는 땀 흘리는 일상에 적응했다. 자연과 벗하며 흙에 씨를 뿌렸다.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에세이 ‘눈길은 혁명의 요람에서’를 쓰기도 한다. 친구 신현중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대남 선전 에세이 ‘붓을 총·창으로!’를 낭독할 때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세파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인간 백석의 모습이 처연했다.
이윤택 연출과 연희단거리패는 기록극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조명했다. 시인 김기림 구상 모윤숙, 소설가 한설야, 화가 정현웅 등 백석 주변 예술가들이 화자가 되어 그의 시를 낭독하고 당시 삶을 불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백석을 중심으로
문학이 연극의 힘을 빌어 생명을 얻은 밤이었다. 관록의 배우 오동식의 열연이 무덤 속 백석의 고뇌를 고스란히 끄집어냈다. 대학로 소극장이 백석의 창작열과 한(恨)으로 들끓었다. 공연은 11월 1일까지.(02)763-1268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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