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우리의 판소리와 서양의 음악이 만났다. 전혀 다른 둘의 만남은 도리어 조화를 이루었고, 도창이 전해주는 판소리는 뮤지컬 ‘아랑가’만의 힘이 되었다.
‘아랑가’는 도미설화를 근간으로 하는 뮤지컬이다. 백제 역사에서 실패한 왕으로 불리는 인물이 둘 있는데, 한 명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자 삼천궁녀 설화를 탄생시킨 의자왕이며, 또 다른 한 명은 백제 한성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21대 왕 개로왕이다. 역사적으로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 도림에게 속아 국력을 낭비했다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함락당하고 영토도 잃고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
‘아랑가’는 삼국사기에 실린 도미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도미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개로왕(蓋鹵王)이 아닌 백제 개루왕(蓋婁王)으로 돼 있다. 개루왕 통치 당시 목수 도미에게는 아랑이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아랑의 미모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도미를 변방으로 보내고 거짓으로 신하를 왕처럼 꾸며 아랑을 시험하지만, 총명했던 아랑은 계집종을 자기처럼 꾸며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를 알게 된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고 강제로 배에 태워 띄워버리고는 아랑을 강제로 입궁시키고자 했다. 이에 아랑은 월경을 핑계로 궁을 탈출한 뒤 도미를 만나려 강가에서 울부짖었다. 그때 물 위에 조각배가 떠내려 오므로 그것을 타고 천성도에서 남편을 만났으며, 이후 그들은 고구려 산산으로 가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도미설화에서 등장하는 개루왕은 백제 4대 임금이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개로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도미설화를 차용한 ‘아랑가’이지만, 완전히 설화의 내용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저주로 괴로워하던 개로왕은 꿈 속 여인의 등장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고, 이를 알게 된 도림은 ‘꿈 속 여인’을 이용해 백제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다. 꿈속 여인은 백제의 충신이었던 도미 장군의 아내 아랑이었다. 개로왕은 아랑에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목은 ‘아랑가’이지만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인공은 개로왕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남의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이를 받아주지 않으니 일가족을 몰락시키는 ‘지질한 민폐의 전형’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로 개로왕의 행동이 약간이나마 설득력을 얻게 됐다. 다만 개로왕의 비중이 높이지다 보니 ‘아랑가’의 타이틀롤인 아랑과 도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 수밖에 없었고, 극이 전개됨에 있어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됐다.
중심인물 외에 ‘아랑가’에 출연하는 배우가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극의 화자인 도창이다. ‘아랑가’의 전체적인 흐름을 객석에 알려주는 도창은 때로는 극 밖에서 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또 때로는 극 안으로 들어가서 백제 백성부터 예언가까지, 다양하게 변모한다. ‘아랑가’에서 도창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단순히 이야기를 끌고가 줄 뿐 아니라, 극의 특징을 잡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랑가’ 이전에도 ‘서편제’와 같이 판소리를 이용한 작품들은 있었다. 하지만 ‘아랑가’와 같이 작품을 위해 작창을 하는 뮤지컬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랑가’는 대학생들이 페스티벌 참가를 위해 만든 작품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기존의 것을 깨뜨리고 파격적인 시도를 한 젊은 예술가들의 상상에서 출발한 ‘아랑가’는 이후 CJ 크리에이티브마인즈와 예그린 앙코르 등의 과정을 통해 다듬어졌고, 빠르게 성장해 정식 상업극으로 발전하게 됐다.
음악적인 변화를 꾀한 만큼 무대는 최소한의 것만 담아냈다. ‘아랑가’는 마당놀이를 보는 것처럼 무대 위에 아무것도 없다. 배우들이 입퇴장을 하는 곳을 하얀색 실커튼으로 꾸민 것이 전부이다. 이 실커튼은 무대와 무대 뒤를 구분해주는 경계선이 되는가 하면, 영상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되기도 하고, 개로왕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저주를 보여주는 막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실커튼과 무대 바닥을 꾸미는 조명과 영상은 ‘아랑가’에 현대적인 감성을 불어넣어주며 고전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아랑가’의 특성을 더욱 부각케 했다. 판소리와 창극을 활용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아랑가’에 세련됨을 더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다면 ‘아랑가’는 연출적으로나 완성도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배우의 연기, 음악, 판소리, 무대미술 각각의 요소는 훌륭하나 전체적으로 ‘맛있게’ 버무려졌다기에는 2%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음악 위에 뛰노는 판소리를 즐기는 것 하나만으로 ‘아랑가’는 볼 가치가 충분하다. 오는 4월10일까지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