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했던 춤판을 한바탕 뒤흔든 건 뜻밖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들이었다. 1962년 창단 이래 한국 전통춤을 대표하는 단체로 권위를 누려온 국립극장 산하의 국립무용단은 지난 2014년 최고의 모험을 감행했다. 최초로 외국인에게 안무를 의뢰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핀란드의 유명 안무가 테로 사리넨과 함께 한 희대의 신작 '회오리'(2014)가 만들어졌다. 모험은 쉴 새없이 이어졌다. 때마침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프랑스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안무가 조세 몽탈보와 작업한 '시간의 나이'(2016)가 공개됐다. "푸른눈 외국인이 한국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편견 섞인 우려를 뚫고 관철시킨 결과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세계 현대무용의 최전선에서 활약중인 해외 안무가들의 세련된 감각은 갈고 닦인 한국 무용수들의 빼어난 기량과 만나 압도적 시너지를 냈다. 전통춤 공연으론 이례적으로 국내 객석 점유율은 80~90%를 가뿐히 뛰어넘었고 유럽의 권위 있는 축제와 극장들의 초청이 빗발쳤다. 348년 역사의 파리오페라발레단을 20년간 이끈 세계 무용계의 '여왕' 브리지트 르페브르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발전을 이룬 국립무용단의 시도 자체가 예술적"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근 몇 년 간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해외 안무가들과 국립무용단의 협업 작품 2편이 올 봄 나란히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2014년 공개됐던 테로 사리넨의 '회오리'(3월30일~4월1일)와 지난해 초연된 조세 몽탈보의 '시간의 나이'(4월27~29일)가 그 주인공이다. 해외 안무가의 숨결이 닿은 점은 같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회오리'가 한국 전통춤이라는 원재료를 곱게 갈아 은은한 식감을 준 요리 같다면, '시간의 나이'는 재료 본연의 맛이 드러내놓고 톡톡 씹히는 퓨전 요리 같다. 초심자라면 부담없이 취향에 따라 골라 먹어볼만한 성찬이다.
'회오리'는 자연환경과 동식물에서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적' 안무를 추구하는 사리넨의 스타일이 호흡을 통한 발 디딤을 기본으로 삼는 한국무용의 움직임과 '찰떡궁합'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는다. 극히 간결한 무대와 대비되는 드라마틱한 조명, 추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연출이 돋보인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한국 춤의 DNA를 간직하면서도 무용수 개개인의 감정과 개성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 수작"이라고 평했다. 그에 비해 몽탈보의 '시간의 나이'는 좀더 직관적이고 유쾌하다. 장구춤·살풀이춤·한량무 등 한국 전통춤의 원형이 발레·플라멩코·힙합의 몸짓과 천연덕스럽게 공존한다. 춤과 영상이 조화를 이루는 안무가 고유의 특징도 배어있고, 색색의 세련된 의상과 경쾌한 음악이 어우러져 남녀노소 쉽게 즐길 수 있는 점이 미덕이다. 두 작품은 각각 2015년 권위 있는 프랑스 칸 댄스페스티벌의 개막작, 2016년 파리 샤요국립극장의 '한국 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됐으며 현지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 주목을 끌었다.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당초 거세던 기존 무용계의 우려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해외 안무가 도입이 전통춤의 정신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일각의 비판은 잔존하는 상황. 그러나 한국 전통춤 하면 으레 따라붙던 '구식' 이미지를 탈피하고 관객 저변을 크게 넓히는 면에서 이 같은 시도는 실보다 득이 더 크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장 평론가는 "지금 소위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춤들 역시 반세기 전에는 가장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춤이었다"며 "전통을 고증하는 것뿐 아니라 전통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 역시 못잖게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김경애 무용평론가 역시 "해외 주요 무대에서 이국적인 면으로만 평가 받던 그간의 한국 전통춤이 국립무용단의 새 시도를 통해 오롯이 작품성으로 평가 받게 된 점이 바람직하다"고
안호상 국립극장장은 "예술이란 동시대 다양한 문화 간 교류를 통해 발전하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며 "한국 전통춤 역시 변화를 껴안을 필요성이 있다"고 전했다. 국립무용단은 내년 가을 시즌 새로운 해외 안무가와 세번째 협업 작품을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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