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1세대 작가 임옥상(67)에게 흙은 숙제였다.
2011년 자연으로 세상을 그리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흙이 마르면 균열이 생기고 캔버스에서 떨어졌다. 지난 1월 6년 만에 이 숙제를 풀었다. 아교와 섬유질, 종이 펄프를 섞으니 문제점이 해결됐다. 작가는 "화학 접착제를 쓰면 흙의 성질이 없어진다. 그런 재료는 의미가 없다. 수용성을 유지하는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본성을 잃지 않은 흙으로 광화문 촛불집회와 용산 화재 참사,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 등 이 시대의 불행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 손으로, 삽으로, 붓으로 노동하듯 그려나갔다. 우직하게 이뤄낸 평면·부조 작품 30여 점으로 6년 만에 개인전 '바람 일다'(9월 17일까지)를 펼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층 전시실 벽을 채운 대작 3편은 촛불집회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을 형상화했다. 우선 30호 캔버스 108개를 이은 '광장에, 서'(360x1620cm)는 광화문 촛불 현장을 그렸다. 분노한 군중들 사이에 떠 있는 노란색, 주황색 원형 패턴으로 빛의 리듬감을 표현했다. 108개 화폭은 불교의 백팔번뇌를 의미하냐고 묻자 "우연한 결과물"이라며 "무수한 기록 사진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광장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이상은 무엇일까. 작가는 '여기, 무릉도원'(259x776cm)으로 답한다. 산세를 호방하게 그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분홍색 복숭화 꽃밭을 품고 있다. 작가는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고 희망찬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신세계를 향한 내 꿈을 대변한다"며 "실제 풍경을 풍유적으로 번안한 일종의 관념적 실경화이자 현대판 무릉도원"이라고 말했다.
분홍꽃 대신 흰꽃을 채운 작품 '여기, 흰꽃'(259x776cm)은 좀 더 관념적인 꿈이다. 흰색은 모든 색깔의 근원이자 모든 빛깔을 담을 수 있다는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관람객의 꿈을 순백의 꽃에 펼쳐보시길"이라고 했다.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는 대작 3편에 쓴 흙은 어디서 가져왔을까.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면서 발견한 마사토(화강암이 풍화한 모래)를 일산 작업실로 퍼날랐다고 했다.
왜 흙을 쓰냐고 묻자 "사람은 땅 위의 존재"라며 "흙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정말 삭막할 수 밖에 없다"며 흙 예찬론을 폈다. "유년시절 부여 농가에서 살았는데, 흙을 잘 느끼는 방식은 농사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생명을 키우고 보람을 느끼면 세상이 오늘날보다 나아질 겁니다.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세상에 흙덩어리를 던졌지요."
칠순을 눈 앞에 뒀지만 그의 에너지는 넘쳤다. 2015년에는 복면 시위대를 IS(이슬람국가)에 비유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에 분노해 그의 얼굴을 본 뜬 초대형 가면을 만들어 시위에 나갔다.
"작업장에서 박 전 대통령 가면을 쳐다보니까 굉장히 쓸쓸해보였어요. 그래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가면도 만들었어요. 독재자 시리즈를 만들려고 하다가 말년에 복잡해질 수 있겠다 싶어 '알리바이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등 권력자 시리즈로 바꿨어요. 100여명 가면을 만들어 허름한 공장에서 전시할 겁니다."
전시장 1층에 국가 원수 14명의 얼굴을 풍자한 '가면무도회' 시리즈가 설치돼 있다. '상선약수-물'은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을, '삼계화택-불'은 용산 화재 참사를 주제로 물과 불의 대립을 보여주는 드로잉 작품이다. 정부에 대립각을 세워온 작가는 "어느 정권에서나 잠들지 않는 예술 영혼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작가는 "민중미술로만 보지 말고 그냥 나로 봐달라"며 "6년간 고생했으니 이번 전시회 내내 먹고 마시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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