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뚜르드 몽블랑 트레킹 중인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인간관계라는 단어는 의미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산에 간 김에 인간관계를 산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았어요. 산을 한꺼번에 오를 수 없듯,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오르락 내리락을 경험해야 합니다. 또한 산이 한 번에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듯이 한 인간도 끝없이 계속 만나야 알 수 있지요. '인간관계는 산이다'라는 말은 이런 산과 인간관계는 닮았다는 깨달음을 담은 말입니다.
Q. 6일 동안 매일 6시간씩 걸었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었나?
A.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4계절 날씨를 다 경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침엔 비가 오다 갑자기 화창해지고 어느새 우박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산이기 때문에 체감 온도가 내려가면 매우 위험합니다. 결국 일행들과 우리가 이런 상태로 트레킹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했습니다. 철수를 위해 가이드와 협상을 하러 가는 순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일행들의 의사를 물었어요. 철수를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장이 바뀌어 있었죠. 그 때 처지가 입장을 결정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 처지에 따라서 A의 입장을 갖고 있어도 타인에 의해 B의 입장을 취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또 동행한 일행 중 한 명은 종아리에 알이 베겨서 내려갈 때 뒤로 내려갔어요. 그때 우리 인생은 때로는 뒤로 걸어봐야 뒤로 걷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로 걷는 사람 통증은 앞으로만 걷는 우리가 모르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만 걷는 사람의 통증을 모르지 않을까?' 새삼 역지사지의 의미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Q. 관계가 처지를 결정한다는 말에서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2012년 '사하라 레이스'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를 절대로 쓰지 마라' 고 일갈했다. 뚜르드 몽블랑에서 얻은 깨달음도 같은 맥락인가?
A. 책상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한계에 도전하기 전에 한계선을 미리 긋습니다. 반면에 몸으로 세상의 지혜를 습득하는 사람은 한계를 몸으로 느끼죠. 능력의 심화와 확장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처럼 몸으로 한계를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는 판단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이 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는 말이 명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하라 레이스에서 한계선을 몸으로 직접 체감해보니 한계를 알고 멈추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번에 몽블랑에선 한계까진 아니었지만 등산화를 선택하는데 실수가 있어서 살이 벗겨졌습니다. 하산할 때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계속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다행히 여행 전에 플랜B로 여벌의 등산화를 챙겨서 성공적으로 트레킹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 뚜르드 몽블랑 트레킹 중인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맞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대비하는 경험이 중요함을 느꼈습니다.
Q. 거의 모든 경험이 그동안 나온 저서의 헤드라인과 연결되는 것 같다. 사하라,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몽블랑에서 동행했던 많은 세계시민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A. 사하라에선 200여명 정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하라 레이스의 텐트는 모두 남녀 혼숙이어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여정이 너무 고되어서 옆에서 누가 자든지 머리를 대자마자 쓰러지듯 잠을 잤습니다. 사하라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어요. 본인이나 지인이 암이 걸려서 극복하려는 용기 주거나 얻기 위해, 또는 자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킬리만자로에서는 '쑤마'라는 탄자니아 세르파 리더가 기억에 남네요. 그는 약 20명의 대원의 리더였는데, 그의 긍정적인 생각이 극한 상황에서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서 결국 등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My office is the top of the mountain(내 사무실은 산 정상이다.)"이라고, 자신은 지금 출근 중이라고 농담하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우리가 힘겹게 오르는 고통의 목적지조차도, 일상화된 그에게는 농담의 대상이었던 것이죠.
몽블랑에서는 전세계의 마라토너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뒤에서 바라보니 건강미가 넘치더군요. 글로벌 리더들이 갖고 있는 통찰력은 신체에서 나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상시의 건강관리 또한 글로벌리더의 자질임을 깨달았죠.
Q. '비정상이어야 정상에 갈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여러 비정상들인들에게 위로가 될 듯하다. 주변에 사례가 있다면?
A. 오늘 강연을 하는 이곳 준오 아카데미 강윤선 대표님도 아파트를 팔아 유학을 가서 미용 기술을 공부했습니다. 정말 도발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이죠.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적인 머리를 써서 계산을 합니다. 하지만 비정상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즉 본인들의 직감을 믿습니다. 가슴으로 느낀 점이 머리로 올라가면 안 해도 될 열 가지 이유를 찾고, 머리로 계산을 하기 전에 저지르는 사람들은 되는 방법 10가지를 찾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딕 포스베리라는 선수가 세계 최초로 뒤로 뛰어서 2m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었는데, 정상에 오르는 비정상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상에 간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늘 정상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생각에 물음표를 던지고 시비를 걸죠. 원래 그렇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Q.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왜곡으로 상처와 회의감이 생길 때 극복 방법은?
A. 몰상식한 사람들은 팔십 퍼센트의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혁명은 몰상식한 사람들이 주도해요. 정상적인 사람들의 눈총을 조금만 참으면 몰상식에서 '몰'이 떨어지고 그게 상식이 됩니다. 물론 상식이 조금 지나면 식상해지고 몰상식한 사람들은 다시 식상함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힘들지만 버티고 견디면 자신들을 질타하던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상식에 시비를 거는 몰상식한 사람이 주도해 나가는 것입니다다.
↑ 안나푸르나 등정 중인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유학시절 공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영어를 잘 못했던 저는 남들이 두시간 공부할 때 열 두시간 앉아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남보다 오랫동안 버티면서 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헬스를 하며 몸을 단련했죠. 며칠 밤을 새도 싸울 수 있도록요. (웃음) 유학 이후 삼성에 입사한 이후 마라톤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항상 하프 마라톤만 뛰다가 춘천에서 처음으로 풀코스에 도전했습니다. 문제는 하프와 풀코스의 난이도 차이가 거리처럼 단순하게 두 배가 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몇 십 배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죠. 풀코스를 뛰다 보면 오만 가지 잡생각이 들고. 발톱이 빠지는 통증, 물집이 잡히는 통증이 몸을 뒤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뛰는 이유가 있어요. 하프 지점을 넘어서면, 뒤돌아가는 것보다 앞으로 가는 게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뛰게 됐어요. 교통 통제 관계로 5시간이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내 뒤에선 선수들을 태우는 버스가 쫓아오고 있었고, 이 수거차량에 안 타려고 버티다 보니 4시간 58분만에 완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삼 풀코스와 하프의 정신무장의 차이점을 느꼈는데요, 하프 마라톤이 목표라면 10킬로만 넘어도 힘들지만 풀코스가 목표면 하프를 넘어도 별로 힘들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신체의 한계에 계속 시도해보고, 한계가 왔을 때 내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실험을 해보고 싶은 욕구 생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신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신체가 마음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라는 걸 깨달았죠. 몸이 망가지면 우주가 무너지기 때문에 마인드 컨트롤도 안 되더라고요. 체력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 더 멋진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 필요한 기반이 되는 거 같습니다.
Q. 마라톤 완주 과정에서 '러너스 하이'를 경험한 주자들이 달리기를 멈추지 못한다고 하는데.
A. 전 사실 러너스 하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죠. (웃음) 엄청나게 달린 거 같은데 1km밖에 못 왔다는 게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던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메인스타디움이 보이기 시작하면 놀라운 힘이 생기면서 몸도 하늘을 날 듯 가볍게 느껴집니다. 결승선에서는 아들과 딸이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가는 순간 무거운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지고 포기하고 싶었던 나약한 생각도 잊어버린 채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제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게 러너스 하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메인 스타디움 한 바퀴를 돌면서 ’이 짧은 순간의 경이로운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 42km를 달려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Q. 8월에 출간한 87번째 단행본인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를 마윈이 설립한 창업사관학교, 후판대학과 알리바바 사전답사를 위한 항저우 출장 중에 읽었다. 책 내용은 읽지 않고 제목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들을 마구 쏟아낸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외국에서 보니 더 안타까웠다. 우리 사회의 단면인 표현하는 분노 외에 침묵하는 분노도 많을 듯 한데,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야 하는가?
A. 사람이 성장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으뜸은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영복 교수님도 그 어떤 참을 수 없는 기쁨도, 통렬한 아픔도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상처받기도 하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기도 하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고 누구는 상처를 주고 누구는 즐거움 주지만 그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교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결국 종합해보면 인간관계에서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가슴에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희망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반대로 지금은 별 고통없이 운이 좋아 고공 행진하는 사람들은 어느 수준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겠죠. 그러니까 지금이 너무 힘들다고 좌절해서도, 잘나간다고 자만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역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사물(事物)이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必) 반전(反轉)된다는 의미예요. 내가 지금 힘든 시기라면, '아 더 내려가자,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에너지를 축적한 다음 때가 되면 치고 올라가자, 반드시 때가 올 것이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느 목욕탕 간판에도 써 있잖아요.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웃음)
↑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출간기념강연장인 준오아카데미에서 배양숙 글로벌인사이트포럼 대표와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앙스트블뤼테는 생물학적인 용어입니다. 전나무가 평상시와 다른 위기감을 느낄 때 종족 본능을 발휘해 평상시의 몇 백배의 꽃을 피우고 장렬히 전사한다는 걸 지칭하는 용어죠. 위대한 창작을 일으킨 사람들은 앙스트블뤼테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하는 시점에서 명곡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니체도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창작의 열망을 불태웠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고 편안할 때는 뭔가 새로움을 만들지 못합니다. 낯설고 불안함을 만났을 때, 위기감을 느낄 때 평상시와는 다른 창작의 힘을 얻죠. 저도 사실 대학원생들이 난관에 봉착해 앙스트블뤼테를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도 평상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머리를 쓰기 시작해서 대단히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결국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위기상황에 빠뜨리면 놀라운 창작의 에너지,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Q. 불안이 주는 큰 두려움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A. 맞습니다. 유태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이 말은 정착지 없이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늘 언제 어디서 잠잘지 고민하고, 정착지 없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오늘날 유태인들에게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게 한 원동력이라고 하죠. 인간은 너무 안전한 일상과 동일함을 반복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도록 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울고 싶을 때 사하라로 떠나라》 에 '내가 지고 가는 배낭의 짐은 버리지 못하는 욕심의 짐이다'라는 구절은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나?
A. 사하라에서 절실하게 느낀 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바로 '짐' 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처럼 처음 간 사람들과 프로는 속옷 개수에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저는 불안하니까 속옷을 모두 챙겨 갔는데 이 무게가 제 어깨를 누르는 힘이 어마어마하더군요. 프로의 오랜 체험적 노하우는 짊어지고 가는 짐을 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내 무게가 가벼워지면 결국 더 멀리 가게 되는 것이죠.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도 강의를 하는데 해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파워포인트를 100장 만들었어요. 그 중 40장을 버리고 60장으로 강연을 했는데, 사실 여기서도 더 버려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버리는 방법을 더 많이 배워 마침내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요?
Q. 오늘 인터뷰를 위해 준비했던 질문들도 새벽에 줄이느라 쉽지 않았다.
A. 채우기 전에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러닝(learning)보다 언러닝(unlearning). 고정관념이나 통념, 상식과 관습, 타성과 관성, 그런 것들을 버려야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들어올 공간이 생겨요. 무용지식(Obsolete Knowledge)을 버려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기존 지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축적만 하면 지식의 소화불량을 피할 수 없습니다.
↑ 사하라 사막 횡단 중인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도전' 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전의 정의가 바로 지금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인간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능력의 확장과 심화를 경험합니다. 도전을 포기하는 순간 인생도 많이 무료해져요. 늘 가보지 못한 미지(未地)가 있다는 것, 그 미지를 탐구하려는 호기심과 그곳을 향하는 도전, 이런 것들이 삶의 엔진이면서 활력소입니다. 육체적인 미지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미지, 예를 들어 '책을 100권을 쓰겠다' 라는 결심도 그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2015년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갔다 왔기 때문에 내년에는 유럽의 최고봉인 엘브루즈(Elbrus, 5,642m)에 가보려고 합니다. 내년 7월에 갈 예정인데, 지금부터 심장이 떨려서 병원을 가야할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심장이 뜁니다. 그게 바로 내가 살아가는 힘인 것 같아요.
Q. 2012년 알래스카에서 '위대한 자'라는 의미가 담긴 맥킨리산 6194m 정상에 랜딩해 태고의 정기를 느껴본 적이 있다. 5640m인 엘브루즈보다 조금 높은데 도전할 생각이 있는가?
A. 세계 7대 대륙에 산이 하나씩 있지요. 에베레스트는 솔직하게 조금 힘들 것 같고, 한 해에 하나씩 갈 예정입니다. 내후년에는 호주에 있는 칼스텐츠(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아의 경계, 4884m)를 가보려고 해요.
↑ 안나프루나 등정중인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
A. 저는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을 좋아합니다. 시인인데도 사람의 감정 상태를 미적분해서 표현할 정도로 언어의 해상도가 엄청 높은 분이죠. 인간관계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를 바랐는데 오해를 하기도 하고, 이해를 바라는 것은 나를 오해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죠. 제가 혹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오해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날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인간관계는 이해와 오해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 같습니다. 이해와 오해라는 단어는 한 글자 차이지만 인간관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두 가지 상징적인 현상이죠.
Q. 이 글이 와 닿은 이유가 상대의 입장에서 걱정하고 염려해서 조치한 배려를 상대는 배신을 넘어선 무시하는 처사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겪고 있을텐데, 결국 '단절'만이 해답인가?
A. 최근에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스승님과 인연이 있는 선후배들 50명을 모아서 작은 행사를 진행했는데,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라는 주제로 서간집을 발간했습니다. 서간집 글 중에 한 사람의 글을 조금 윤문하고, 생각이 짧거나 끊겼다고 생각하는 문장에는 앞 문장과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1~2줄 정도 추가했습니다. 분량이 조금 모자라서 그 사람의 생각을 조금 확장시키는 문장을 한 두 개씩 추가한 것이죠. 제 입장에서는 생각의 미묘한 차이를 잘 감지해서 배려했다고 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배려를 해줬는데도 이게 일종의 배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함부로 내가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서 행동하면 무례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Q. 넓은 의미의 '상대방 입장' 이라는 말을 어느 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A. 살다 보니까 밥맛이 없는 사람을 설득하면서 제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사정을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오늘 강의할 내용 중에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 또는 의지를 지칭하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스피노자의 개념이 있습니다. 만나면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반대의 사례도 있죠. 살날이 며칠 안 남았을 때 과연 누구를 만나야 할까 고민했더니, 내 존재감을 떨어뜨리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존재감을 증진시키는 사람을 만나는 게 인간관계의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밥맛이 있는 사람과 밥을 먹을 시간도 부족한데 밥맛이 없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서 코나투스를 떨어뜨리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관계를 무시, 단절하지는 않되,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입장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명하거나 설득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Q. 칼릴지브란은 부부, 연인사이도 바람이 드나들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인가?
A. 안도현의 '간격'이라는 시의 내용처럼 몽블랑의 나무들도 간격을 두고 서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도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분류했죠. 친밀한 사이,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 거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친밀한 거리는 말 그대로 막역한 사이, 개인적 거리는 악수 정도 하는 사이, 사회적 거리는 오디션을 보는 거리, 공적 거리는 멀찍이 바라보는 거리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공적 거리에서 친밀한 사이까지 순차적으로 좁혀져야 하는데, 거리 조절이 안 되고 나하고 친밀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상호 간의 거리를 줄이면 매우 부담스럽다는 것이죠. 일상생활에서도 일면식도 없거나 지나가다 인사했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결혼식에 초청하는 청첩장을 보내거나 조의를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는 등 일방적으로 거리를 줄이고 친밀감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하는 건 매우 난감하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Q.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자리에 와서 자리에 맞지도 않는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이 더러운 인간으로의 전락' 이라고 쓴 《순수와 위협》의 저자 메이 더글라스의 명제를 SNS에서 읽었다.
A.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식탁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신발의 자리는 식탁도 아니고 사람의 발도 아니고 신발장입니다. 신발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 침대나 식탁에 올라가면 더럽게 느껴지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자기 자리라는 게 있죠. 자기가 마땅히 설 자리나 평생을 두고 살 자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인간은 왜 탄생할까요? 더러운 인간은 바로 자기가 가면 안 되는 자리를 가서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자기 자리도 아닐 뿐더러 자질도 없고 자세도 갖추고 있지 않은데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사투를 벌이는 인간이 바로 더러운 인간입니다.
Q. 자기 자리가 아닌데 자기 자리라고 믿고 끊임없이 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스스로 깨닫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깨닫고,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도 못 깨닫죠. 아무리 자기 자리를 찾는 방법에 관한 책을 읽어도 쉽게 자기 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정말 운 좋게 자기 자리를 빨리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정치적인 자리에 가지 않을 거고 제 자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리는 책 읽고 연구하는 교육자로서의 자리이죠. 남들의 의지 때문에 타인의 자리에 가면, 내가 가면 안 되는 자리이기에 스스로도 피곤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야 말로 제가 해야 할 일이고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자리가 제가 설 자리이자 살 자리인 것이죠.
↑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출간기념강연장인 준오아카데미에서 김봉진 배달의민족 대표와 유영만 한양대 교수, 배양숙 글로벌인사이트포럼 대표. |
A. 재미는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주제를 강연해도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풀어내는 전략을 구현하면서 관중과 같이 호흡하는 과정은 언제나 재미를 넘어 저를 기쁘게 만드는 살아가는 의미이자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Q. 연세대 바른 ICT 연구소 4차 산업혁명 시대 개인정보활동 APB포럼에서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 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라' 고 말했는데.
A. 저의 관심은 4차 산업혁명 도래에 따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있는 위기 시대에 인간의 고유한 능력, 즉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찾아내고 육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능력으로 사람을 무장시켜야 4차 산업혁명을 인간이 주도하면서 더 행복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인간의 능력 중 하나는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인공지능 또한 질문을 할 수 있지만 호기심을 기반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또 가슴으로 생각하는 공감 능력이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아픔을 느끼고,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미덕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숭고한 덕목입니다. 머리는 인공지능이 따라잡을 수도 있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인공지능이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 반성을 할 때도 머리에 두 손을 얹지 않고 가슴에 두 손을 얹지 않습니까? 이런 가슴 아픔, 그 공감능력으로 포착한 타인을 치유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면서 두 가지 이상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연상의 결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이런 과정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이같은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세상으로 구현될 때 비로소 어제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네번째 고유 능력은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 입니다. 아이디어를 몸을 던져 실현하며, 다양한 시행착오도 겪고, 우여곡절 힘든 경험과 딜레마 상황에서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가운데 발현되는 능력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이런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발굴하고 개발해야 4차 산업혁명을 바람직한 사회변화의 추동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Q. 제자 주수원씨가 이 책의 후기로 샤르트르의 희곡 《NO Exit》 중 '타자는 지옥이다(Hell is other people)'를 인용했다. '타자는 지옥일 수 있지만 나의 성장을 견인하는 축복일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고 썼는데, 방전과 충전도 모두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라는 의미인 듯 하다.
A. 그 친구는 사실 법학 전공하는 친구입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주제에 끌려서 그 조합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다양한 전략과 방법을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타인을 지옥이라고 한 이유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면서 나의 행동반경에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타자들을 너무 의식하면서 내 자아를 잃어버릴 수도 있죠. 하지만 과연 타자가 지옥일 뿐일까 생각해보면, 여러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타자는 미래이자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와 다른 타자를 만나지 않는 한 나는 제2, 제3의 나로 변신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어제와 다른 나,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죠.
Q. 대부분의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 같다. 책 앞부분에서 경청을 하지 않고 내 말만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했다. 나의 경우는 깊은 신뢰를 느끼는 몇 명의 사람들에겐 아이처럼 그간의 이야기를 쏟아 내기도 한다. 혹여 들어주는 그분들의 입장에선 내가 만나면 안 될 사람일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A. 맥락성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죠. 그 메시지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일리 있는 명제일 뿐입니다. 타자가 이미 나를 믿고 있다는 신뢰가 형성됐다면 쏟아내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쏟아내도 그걸 받아들 수 없으니까요. 인간관계는 신뢰를 매개로 연대가 이루어질 때 지속 가능해집니다.
Q. 등화가친의 계절이다. 바빠서 책을 못 읽는 게 아니라 안 읽어서 바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가을은 날씨가 좋은 향락의 계절이기 때문에 독서하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말 책을 읽을 자투리 시간조차 없을지 아쉽기도 합니다. 5분을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시간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는 말도 있듯이, 결국 본인의 의지와 습관입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잠시 핸드폰을 집어넣고 책을 꺼내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책을 읽을 때, 아주 사소한 일상의 변화이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것 같습니다. 가을이 정말 사색과 독서의 계절이 되려면 일상 사이에서 작은 독서를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독서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Q. 문득 청소년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느라 물리적으로 독서할 시간이 없었기에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만원버스에서 문고판을 읽으며 몰아(沒我)의 경지를 경험했었다. 그 시간들의 축적이 현재의 인문학적 소양의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A. 저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발전소에서 일할 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집채만한 발전기가 돌아가는 그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내가 읽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책이 읽히더라고요.
Q. 마지막 질문이다. 1995년 1월 1일에 출간된 《지식경제시대의 학습조직》 이후 지난달 8월에 출간된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까지 번역본 포함해서 총 87번째 단행본이 나왔다. 이 추세라면 4년 후쯤 100번째 책이 탄생될 것이라 예상되는데, 100번째 출간기념 강연회를 한민족의 시원으로 알려진 바이칼 알혼섬에서 하자는 얘기도 있다. 벌써 기대가 되는데, 100번째 책의 주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A. 많은 사람들이 100번째 책에 대해 물어보는데, 솔직히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어떤 책을 낼까 고민하다가 그동안 낸 책들의 서문만 묶어서 책을 낼까 고민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그동안 내놓은 책들이 결국 사람에 관한 책들이었으니 100번째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사회를 아우르는 책이 되기를 바라요. 그때면 60살을 넘어 6학년이면 졸업할 때이니,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시각으로 사람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을까요?
↑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유영만 한양대 교수. |
개념 없는 체험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대표 비정상(? · 非正常 ) 지식생태학자 유영만교수를
처음 만났던 2013년 어느 자리에서의 대화들 중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의 제자들이 사는 밥은 먹지 않습니다. 취직을 하고 인사 와서 사는 밥은 한 번 정도는 먹지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로 스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유영만 교수의 가치관을 봤다. 그 후로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공적인 만남들과 사적인 소모임들이 이어졌다. 도움이 필요한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무조건 잡아주고 성장시켜주려 애쓰는 모습은 첫 만남 때의 대화에서 전해진 인품의 연결들이었다.
많은 주변의 사람들 중 배려하고 도와준 마음에 상처만 남
"허허허..."
이런 사람은 꼭 만나야 한다!
[배양숙 글로벌인사이트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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