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패키지 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기자와 작가로 여행 일을 하며 ‘팸투어’를 수없이 가봤지만 그건 취재 활동이다. 정해진 일정이 있고 인솔자(주로 관광청 직원)의 가이드에 따라 진행되는 건 패키지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주최측에게 취재에 필요한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도 있고, 패키지 여행과는 취재지와 체험 콘텐츠 등 모든 것이 전혀 다르게 구성되는 등 패키지 여행과는 말과 하마처럼 완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동백정에서 맞은 서천의 일몰 |
“가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가라면 가고, 먹으라면 먹고, 쉬라고 하면 쉬고, 쇼핑하라고 하면 뭔가를 사면 돼. 물론 안 사도 상관없고. 호텔도 다 잡아주지, 비행기표, 기차표도 다 사주지. 내가 신경 써야 할 게 하나도 없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여행이 어디 있어?”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교통편이며 숙소를 구하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팠던가. 이걸 다 해결해주고 여행 코스도 다 짜준다니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데 난 왜 이 좋은 걸 이태껏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것일까.
“혹시 국내 패키지 여행 가봤어? 안 가봤다면 한 번 가봐. 여행이란 게 원래 직접 겪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곧 환갑을 바라보는 여행작가 선배가 나무 접시에 담긴 강냉이 몇 개를 입 속으로 털어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친구들이랑 일 년에 한두 번은 가거든. 세상에 이것보다 편하고 좋은 게 없더라고.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잠자리도, 음식도 모두 훌륭해. 우리가 생각하는 싸구려 패키지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 한옥에서의 편안한 하룻밤을 보장하는 문헌전통호텔 |
내가 산 상품은 ‘한옥 호텔에서 묵으며 즐기는 군산 서천 1박 2일’ 상품이다. 익산역에 도착하면 전용 버스가 ‘참가자’를 싣고 군산으로 데려간다. 간장게장으로 점심을 먹고(군산의 별미라고 했다) 군산을 여행한 후, 서천의 한옥(옛날에는 서원이었는데 지금은 한옥호텔로 꾸몄다고 한다)에 가 그곳에서 하룻밤 묵는다. 다음날 한옥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서천의 명소를 여행한 후 다시 익산으로 가 기차를 탄다. 용산역에 내리면 여행은 종료다.
정말 심플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정이다. 군산은 여러 번 가봤지만 모두 취재로 간 것이라 이번에는 여행 삼아 돌아보고 싶었다. 서천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한옥호텔에서 하룻밤 머문다는 점도 좋았다.
여성 가이드가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이번 여행 동안 안내를 맡게 된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원활한 진행을 위해 시간은 꼭 지켜주시고, 불편한 점 등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 주세요.” 짝짝짝. (여성 팀을 향해) “지난번 안동은 어떠셨어요? 오늘 군산과 서천도 좋을 겁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가족 팀을 향해) “아, 이번에 삼촌 분 부부까지 오신 건가요? 지난 번 강릉에 갔었죠?” (나를 향해) “아, 혼자 오셨어요? 네네, 가끔 혼자 오시는 분도 계세요. 즐거운 여행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짝짝짝.
일어서서 인사를 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로 한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었던 초원사진관 |
“작가님은 저랑 같이 드세요. 그동안 혼자 먹었는데 오늘은 작가님과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앗, 제가 작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가이드 이십 년 차예요. 사람을 보면 직업 정도는 얼추 맞출 수 있답니다. 게다가 작가나 음악가 같은 분들은 어딘가 모르게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게 있거든요. 지금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카메라와는 약간 다르고요. 버스에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작가님이시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체를 들킨 건 좀 쑥스럽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혼자서 간장게장을 먹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게장정식에는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함께 나와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함께 나온 반찬도 먹을 만했다. 숙성한 광어회도 나왔는데 맥주 한 잔 생각이 났지만 참기로 했다. 혼자 여행 와서 낮부터 술이나 홀짝거리는 아저씨로 보이는 건 옳지 않다.
“식사가 맛있습니다.” 나는 광어회를 간장에 찍으며 말했다.
“네, 저희들이 사전에 답사를 다 다니죠. 맛이나 청결도 등을 따져서 식당을 섭외합니다. 요즘 손님들 수준이 보통이 아닌 데다가, 여행업이라는 것이 컴플레인에 상당히 민감한 일이거든요. 열 개를 잘하고도 하나를 못하면 전체가 엉망이라는 평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 푸짐한 꽃게장 정식 한 상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
“철길마을을 돌아보고 길을 건너면 바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입니다. 군산 하면 유명한 곳이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 초원사진관 등이 있죠. 모두가 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성당 아시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입니다. 여기에서 선물할 빵을 사셔도 됩니다. 참고로 한일옥 소고기뭇국과 이성당 단팥빵, 밀크셰이크가 유명하답니다. 자, 같이 오신 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4시 반까지 여기 다시 오시면 됩니다. 궁금하신 점은 단톡방에 남겨주세요. 집합 시간은 꼭 지켜 주시고요.”
경암동 철길마을은 오랜만이었다. 페이퍼 코리아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연장 2.5킬로미터 철로 주변에 들어선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다. 1944년 일제강점기 때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초로 개설되었다가 2008년에 폐역이 되었다. 철길 양옆으로 판잣집이 늘어서 있는데 지금 군산을 대표하는 여행지가 됐다. 철길을 따라 옛날 문방구와 구멍가게에서 팔던 장난감과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옛날 교복을 입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 철길을 따라 옛 추억을 더듬으며 걸어보자,어린 시절 문방구와 점방에서 볼 수 있는 먹거리와 장난감을 만날 수 있다. |
철길마을이며 히로쓰 가옥, 초원사진관…. 이 모든 곳들을 돌아보는 일이 취재가 아니라서 좋았다.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는 건 혼자 여행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다. ‘반드시’ 가야 할 데도 없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억지로’ 가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파트너가 있다면 밀크셰이크를 먹을지, 다른 카페를 갈지, 아니면 여행지 한 곳을 더 봐야 할지 이것저것 고려하고 신경 써야 하지만, 혼자 왔으니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있고 싶은 만큼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게 혼자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집합 시간이 다 돼서 버스로 가니 이미 다른 일행들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버스에 탄 일행 대부분 빵이 가득 담긴 이성당의 노란색 종이쇼핑백을 옆자리에 놓고 있었다. 역시 여행의 큰 즐거움은 맛집과 쇼핑이지.
↑ 히로쓰 가옥 입구, 히로쓰 가옥 내부 |
↑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
↑ 문헌전통호텔의 멋스러운 거실 |
아침 일찍 일어나 서원 주위를 산책했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툇마루와 햇볕을 가득 받고 있는 장독대 등에서 옛 가옥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산책 후 호텔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생선구이를 비롯해 각종 반찬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식사 후에는 다례체험 시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다도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쉽게 배우며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참가자들은 진지하게 임했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건 분명 자유 여행으로 온다면 체험하기가 조금 힘들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인원이 참가해야 차 선생님도 ‘섭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점은 패키지 여행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아침 식사 후 갖는 다례체험 |
“세 곳 모두 돌아보시고 서천국립생태원 주차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서천국립생태원에는 의외로 볼 게 많아요. 꼭 가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거기에 에어컨도 나오고 카페도 있으니 더위가 힘드신 분들은 거기에 일찍 가 계셔도 됩니다.”
↑ 세계 곳곳의 동식물을 만날 수 있는 서천국립생태원 |
서천국립생태원은 전 세계에서 자라는 식물 1,900여 종과 동물 230여 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특히 사와로(saguaro) 선인장이 좋아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미국 애리조나 등 북중미 남서부의 척박한 건조지역에서 15m까지 자라는 선인장이라고 했다. 혼자였기에 이 선인장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거겠지.
↑ 드넓게 펼쳐진 해와 갯벌, 높이 15미터의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서해바다를 만난다. |
마지막 일정은 서천 수산물특화시장이었다. “이번 여행 일정의 마지막입니다. 서해에서 잡은 생선과 해산물이 정말 싱싱합니다. 가격도 저렴해 이곳에서 수산물 쇼핑을 하는 여행객도 많습니다. 말린 박대가 인기인데 서천산을 최상품으로 칩니다. 서천 박대는 ‘시집간 딸이 박대 맛을 못 잊어 고향 서천에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으니 사실 분은 사셔도 됩니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산물 시장에는 주먹만 한 갑오징어와 키조개 등 해산물이 가득했다. 이것저것 쇼핑하는 일행들도 있었는데, 벌써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주변을 살펴본 뒤 나는 주변 식당 몇 곳 중 가이드가 추천해준 ‘의생원’이라는 중국집으로 가기로 했다.
↑ (왼쪽부터)말린 박대, 서해에서 잡은 싱싱한 수산물이 가득한 서천 수산물특화시장 |
“많이 사셨나 봐요.”
“네, 박대도 샀고, 조개도 싱싱해 보여서 조금 샀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주문한 짜장면이 나왔다. 1박 2일 동안 군산과 서천의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 편하게 다닌 것 같다. 혼자 차를 몰고 여행했다면 벌써 지치지 않았을까. 지금쯤이면 다시 돌아갈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한숨을 쉬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짜장면을 다 먹고 버스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버스와 기차가 바통을 넘기듯이 나를 편안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서 탕수육이 담긴 접시가 건너온다.
“이것 좀 드세요. 저희도 많아서요. 그나저나 혼자 다니시는 게 너무 부럽습니다. 나도 다음에는 혼자 패키지 여행 가보려고요. ”
내가 지금까지 여행하며 느낀 건 다른 사람은 나를 전혀 쳐다보지를 않는다는 것.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술을 마시며 주저주저하며 뭔가 어색하게 생각하는 건 자기만의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 자, 그러니까 여러분, 다들 혼자 패키지 여행에 도전해 보도록 합시다!
1. 군산 한일옥은 40년 동안 쇠고기뭇국 하나로 전국구 맛집으로 등극한 곳이다. 한우 안심과 양지 등 쇠고기 부위를 물에 넣고 1시간 이상 푹 끓여 내어 깊고 구수한 맛이 난다.
2. 유락식당과 중앙식당 등 반지 회와 무침을 내는 집이다. ‘반지’는 군산 사람들이 밴댕이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3. 중동에 자리한 중동호떡은 1945년부터 문을 열고 있는 호떡집이다. 기름에 튀긴 것이 아니라 밀대로 밀어 기름기 없이 구워 낸다.
↑ (왼쪽부터)한일옥의 쇠고기뭇국, 유림식당 반지회 정식, 담백한 중동호떡 |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6호(24.9.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