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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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혹독했던 겨울 바람의 기세가 누그러지며 볕이 점점 따뜻해지는 3월입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한강도 이제는 녹아 흐르고 있겠지요. 여기서 질문.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이 된다'를 떠올리셨다면 당연히 옳은 답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당합니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말합니다. '봄이 온다'라고 답할 수 있는 이들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틀렸다고 여겨질 수 있는 답을 과감하게 내놓는 창의적인 이들의 손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거대한 적막 속 홀로 등장했던 굴렁쇠 소년부터 '벽을 넘어서' 공연까지. 번뜩이는 기획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한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문학·역사·철학을 아우르며 '창조적 상상력'을 설파했던 인문학자 이어령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이어령, 스피치 스피치>는 그의 수많은 강연 중 9편을 가려 모았습니다. '보통 사람에게 죽음은 끝이지만,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라고 했던 선생님이 남긴 수많은 반짝이는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업 경영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들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쓸모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 본 누구에게나 의미있는 통찰을 선사할 것입니다.
강연 9편의 청중은 모두 다르지만 골자는 같습니다. 생명 자본과 창조적 상상력의 힘입니다. 이어령은 그간 시대를 이끌어 온 산업화와 민주화는 애초 모순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원리라고 강조합니다. 경제 자유를 추구하는 산업주의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지만 정치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화는 공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할 새로운 원동력으로 제시한 개념이 바로 어떤 원리와도 대립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 '생명화'입니다. 한 생명이 어떤 자본보다도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명 자본'의 시대에 가장 의미있는 자원은 군사력, 경제력도 아닌 창조적 상상력. 그가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받고 있다고 본 자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실용이 아니라 기쁨이 자본이다'. 모든 가정에 냉장고는 필수품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2,3개씩 끝없이 원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Need(필요한 것)을 넘어선 Want(원하는 것)의 세계는 다릅니다. 눈시울을 붉히게 한 시대의 명곡을 담은 CD는 수십 년에 걸쳐 수백만 장이 팔려나가고, 다음 장이 궁금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든 해리포터 같은 소설은 수천억, 수조의 시장을 형성합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 자체로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본 없이도 빛나는 생명력으로 국민적 즐거움을 선사한 손흥민, BTS, 봉준호 등도 그 예입니다. 앞서 언급한 각 분야의 1등까지는 못되더라도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할 적극성을 지닌 구성원이 있고, 그런 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리더가 있는 곳을 이어령은 바람직한 공동체로 꿈꿔왔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저자는 모순되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할 때 창조가 발생한다며 '방충망 이론'을 예로 듭니다. 무더운 여름밤, 어머니는 모기가 들어오니 창을 닫으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람이 시원하니 문을 열라고 합니다. 아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상충되어 보이는 두 요구를 모두 충족할 답은 '방충망'을 설치하는 일입니다. 이분법, 획일적 사고에서 탈피한 창의적인 상상력은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는 나가는 새로운 공간이자 패러다임을 탄생시킵니다. 패러다임 시프트란 쉽게 말해 '해본 적 없던 생각을 해보는 것'. 우리가 맞은 변화의 시대에는 딜레마를 정면 돌파하는 한 사람의 기발한 발상이 수천 명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령은 현재 우리 기업 경영인들에게는 경제적 관점이 문화적 감각보다 우선한다고 지적하며 각성을 촉구합니다. 획일적인 조직문화에서 기존의 틀을 깨는 기획은 그 위험 부담에 대한 공격에 시달리며 시작조차 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상상력은 버려진 무기가 됐습니다.
상상력을 천대하는 경직된 사회에서는 혁신도 탄생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 창조적 발견들은 엄격한 연구 환경이 아니라 자유로운 공간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어령은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친 장소는 책상 앞이 아니라 목욕탕이었음을 짚으며 이런 일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어느 날 아르키메데스처럼 너무 기뻐서 주위를 신경도 안 쓰고 유레카를 외치면서 뛰어나오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우리에겐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낸 보도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 "예술인 1인당 연 소득 1055만 원…국민 평균 절반도 못 미쳐"의 댓글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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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예술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고귀한 길이라기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어리석은 길로 취급하는 사고가 드러납니다. 안정적인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듯해 보이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라고 아름다운 시나 감동적인 공연, 영화 한 편이 전해준 위로에 마음깊이 감사해 본 적이 없을까요?
임지은 작가는 에세이 '이유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예술에 대한 모순된 기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의 전제란 이런 것이다. 예술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하다. 관련 종사자는 먹고살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초월하는 고고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응당 보여주어야 한다." 댓글의 민심대로 정말로 꼬우면 모두가 그만뒀다면…생활고에 시달리던 미혼모 조앤 K.롤링도, 살아서는 단 한 점의 작품밖에 팔지 모한 빈센트 반 고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요하게 안정적인 우리 삶은 과연 지금보다 얼마나 충만할까요?
이어령 선생님은 문화 예술은 그 자체로 가치가 된다며, 문화 예술의 부가가치라는 말만큼 무지한 소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세 끼 밥 먹고 옷 입는 데에 만족하는 순수 필요만 있었다면, 오늘날의 경제활동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비트코인으로 수 시간 내에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고, 챗GPT가 인생 계획까지 짜주는 시대에도 수천 년 전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에 전
천지를 창조한 미켈란젤로까진 못되더라도 저마다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창조를 습관화한 이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될 때까지, 선생님의 직언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며 숫자에만 천착해 관성적인 아이디어만을 반복하는 이들의 양심을 계속해서 쿡쿡 찌를 것입니다.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