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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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깨닫게 됩니다. 특별한 용기나 결단 없이는 하루하루가 그날이 그날인 날들의 연속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 관성화된 일상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어릴 적 생각보다 더 큰 품이 든다는 것을. 매일같이 자신을 등장인물로 삼아 반복 재생되는 장면들이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습니다. 그 풍경이 수 세대 간 이어져 온 견고한 제도의 산물이라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집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끔찍한 관계를 제도의 천막으로 대충 가리고 산다. 외로움은 그 풍경의 상처다.” 풍랑 속에서 죽음을 면하게 해줄 것으로 믿던 어떤 보트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삼켜버린 바다일 수 있습니다. 그 배에서 탈출하고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 한 여자의 이야기, 데버라 리비의 생활 자서전 3부작 둘째 권 <살림 비용>입니다.
이 책은 '가부장제'라는 침몰하고 있는 보트에서 탈출한 한 여성의 고백입니다. 궁핍하더라도 자유롭고, 불안하더라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 선택들. 그 선택의 결과는 속시원하게 짜릿하기보다는 어두컴컴하고 쓸쓸합니다. 그럼에도 '안정'보다 '존엄'을, 몸에 맞지 않는 신발보다 흙투성이 맨발을 선택한 리비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나'로 존재하는 데에 마땅한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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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림 비용’은 통상적 의미의 '집안일'에 드는 비용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스스로를 그 자신으로 '살려두기 위해' 감수한 고통의 총합으로 읽힙니다. 거기엔 고독, 불안정, 그리고 그 모두를 꿰뚫는 글쓰기가 포함됩니다.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로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극작가로 데뷔한 데버라 리비는 1990년대 초 같은 직업의 남편과 결혼해 20년 간 함께했습니다. 온전한 가정에서 두 딸을 키우던 그가 이혼을 선택한 시기는 50세. 가부장제 내에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는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삶을 이어나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보트를 떠났다고 해서 아름다운 자유의 땅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 너머엔 고된 생계, 낯선 공간,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내 새 삶은 어둠 속에서 열쇠를 더듬어 찾는 행위로 요약됐다. 삶은 고달팠고 내겐 대본조차 없었다."
꽃이 만발했던 가정집의 뒤뜰을 떠나 두 딸을 데리고 입성한 낡은 아파트는 난방도, 수도관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생계를 위해 글쓰기를 이어가야 하지만 마땅한 공간은 남의 집 헛간 한 켠뿐, 하나뿐인 컴퓨터는 고장 직전입니다. 출근길엔 이웃의 무례한 참견에 꼬박꼬박 답해줘야 하고, 퇴근길에는 장바구니에 담아둔 닭을 실수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주섬주섬 주워야 했습니다. 중요한 미팅을 마친 후에야 헛간에서부터 따라온 진흙 묻은 나뭇잎이 내내 머리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는 새로운 일상은 고단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장면마다 스치는 결코 낭만적이지 못한 단상을 저자는 오롯이 복기합니다. 더 이상 한 치의 거짓도 스스로의 삶에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이름'에 대한 통찰입니다. 리비의 주변엔 여성들을 이름이 아닌 ‘누구누구 와이프’, ‘여자친구’ 등으로만 부르는 남성이 자주 등장합니다. 움직일 때 마다 나는 소리로 (이름모를) 아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게 하던 신발을 여행지에 두고 온 답답함을 호소하며 이를 대신 찾으러 가는 사랑꾼인지 교도관인지 모를 남편. 바 테이블 너머에서, 산책길에서 만난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해 늘어놓던 이야기를 들으며 리비는 의문을 품습니다. 세상은 왜 그 여자들에 대해 배우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걸까. "우리에게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 걸까?"
그리고는 이에 복수하듯 남성들을 ‘결혼을 세 번 한 친구’, ‘장례식에서 울었던 남자’ 등으로 이름없이 뭉뚱그려 그려내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여성들을 향한 연대도 잊지 않습니다. 기차 안 공용 테이블을 자기 짐으로 잔뜩 채운 남성 앞에서 옆자리 젊은 여성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꺼이 나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 아가씨가 공부해야 해서요.” 낡은 헛간이든, 기차 안 테이블이든—리비는 스스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이름없는 여성들의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어떤 관습은 그저 오랫동안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위를 얻게 된다는 진실을 간파한 이들, ‘당연한 삶’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보트에서 뛰쳐나와 마음껏 허우적대고자 하는 모두에게 <살림 비용>은 기묘한 담담함으로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자신의 밑천을 털어쓴 타인의 진솔한 고백은 스스로의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