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과 명옥헌, 관방제림과 담양천 걷기
담양에 가서 대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 숲을 걸었다. 명옥헌과 소쇄원 등 옛 정원도 산책했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던 옛날 어느 이동통신의 광고도 떠올렸다. 그 광고처럼 일상을 잠시 꺼두고 여행을 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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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녹원의 울창한 대나무숲 |
퇴근 시간은 보통 오후 4시다. 퇴근 후에는 산책을 하며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 와서 저녁을 만든다. 아침에는 주로 단백질 셰이크나 요거트로 간단하게 먹는다. 배가 부르면 오전 작업이 잘 안 된다. 점심으로는 삶은 계란이나 샌드위치, 저녁에는 연어 샐러드나 파스타, 된장찌개 등을 만들어 야구를 보며 와인을 마신다. 작업실 근처에 있는 바에 가서 어묵과 무조림을 두고 생맥주를 마실 때도 있다. 금요일에는 오전만 일을 하고 오후엔 논다. 보통은 주말에도 일을 한다. 언제나 넘치는 것이 일의 속성이고,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 돈의 속성이다.
버터는 역시 실망시키는 법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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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가는 길의 풍경 |
술을 좋아하지만 과음을 하면 다음날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서만 지낸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에 잠길 때도 있지만, 이런 일들을 하는 사이에 가끔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게 인생이라는 걸 이제 아는 나이가 됐으니까, ‘괜찮겠지, 뭐’ 하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 애써 붙잡으려고 해도 세상 일은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상처 입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상처를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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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지내마을에서 먹은 나물 반찬 |
그러면 맛이 확 ‘오른다’. 버터를 넣을 때마다 ‘버터는 역시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여행은 우리 삶의 버터가 아닐까. 내 삶이 뭔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 땐 여행을 떠나면 된다.담양에 들어서서 차창을 내리자 버터처럼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봄바람이 가득 밀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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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적인 풍경의 메타세쿼이어 숲길 |
이맘때면 담양은 여행지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아닐까. 담양 하면 귓전에 대나수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스치는 것만 같다. 담양은 ‘대나무골’이라 불리는데 무려 350개 마을에 대숲이 있다. 그러니까 대나무 숲 사이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다고 보면 된다.
배우 한석규가 나온 광고가 있었다. 그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숲 속을 걷는다. 광고는 거의 10초간 대나무 숲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만을 따라간다. 19초가 지나서야(이건 광고에서는 정말 엄청난 시간이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린다. 이 순간 날아가는 나비. 한석규는 멋쩍은 듯이 함께 걷던 스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나오는 한석규의 내레이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이 광고를 촬영한 곳이 담양의 대나무 숲이다. 당시 이 광고는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큰 반향을 불렀다. 1998년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넘쳐 나고, 가정이 붕괴되던 시기였다. 이 광고는 하루아침에 동료가 회사를 떠나는 광경을 주변에서, 또 뉴스에서 수없이 봐야 했던 국민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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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통신 광고가 생각나는 대나무숲 |
죽녹원은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영산강이 시작하는 양천을 낀 향교를 지나면 왼편에 대숲이 보이는데, 이곳이 죽녹원이다. 운수대통길, 선비의 길, 추억의 샛길, 철학자의 길 등 모두 여덟 개의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죽녹원 숲은 빽빽하다. 햇빛이 침범하지 못한다. 심호흡을 하면 상큼한 대나무 향이 폐 속 깊이 스며든다. 대숲의 산소 발생률은 다른 나무보다 더 높고 음이온도 많이 내뿜는다고 한다. 대나무숲을 걸으면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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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녹원을 산책하는 여행객 |
관방제림이 끝나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로 이어진다. 메타세쿼이아는 미국 서부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세쿼이아’ 이후(meta)에 등장한 나무란 뜻이다. 은행나무와 함께 고대 지구에서부터 존재해 온 화석나무 중 하나다. 일반적인 건물 10층 높이(30m)보다 높은 35m까지 자란다. 가로수 길은 17km에 걸쳐 이어진다. 커다란 나무가 사열하듯 양 옆으로 도열한 풍경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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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창한 숲이 우거진 관방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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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롱나무 뒤 명옥헌 |
담양 하면 떠오르는 곳이 아마도 소쇄원일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 하지만 나는 명옥헌이 더 좋다. 그래서 담양에 갈 때면 언제나 명옥헌을 먼저 찾는다. 명옥헌은 조선 인조 때 장계 오이정(1619~1655) 선생이 어릴 적 돌아가신 선친(고희도)을 기리며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다. 가운데 방을 두고 ‘ㅁ’자 마루를 놓았고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전형적인 호남지방 정자의 모습으로 고졸하면서도 멋들어지다. 아담하다고 봐야 할 크기지만, 꾸밈이 없으면서도 품격이 있다.
정자 오른쪽과 앞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원형이 아닌 사각의 연못은 당시 선조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정자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명옥헌은 그 곁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마치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후일 연못가에 배롱나무가 심어져 지금의 선경(仙境)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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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옥헌의 백일홍 |
‘한국 정원의 걸작’ 소쇄원과 ‘애양단’ 담장
자, 이제 소쇄원으로 가보자. 우리 옛 정원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곳. 조선 중기 양산보(1503~1557)가 세운 별서정원이다. 소쇄(瀟灑)는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 별서정원이란 ‘집 근처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문화생활과 전원생활을 겸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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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소쇄원 가는 길 (아래) 운치 그윽한 소쇄원 |
소쇄원 주 건물인 제월당은 집주인의 개인 공간이다. 햇빛과 달빛이 잘 드는 야트막한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제월당 아래 계곡 근처에 세워진 광풍각은 소쇄원의 사랑채 구실을 했던 곳이다. 정철의 ‘성산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같은 시가 문학의 대표작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소쇄원을 둘러싼 울타리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소쇄원의 담장은 50여 미터에 이르는 흙 돌담으로, 이름은 ‘애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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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의 흙담장 |
담양은 누각과 정자의 고장이라 이를 주제로 여행 코스를 짜도 좋다. “10년을 경영하여 초당 삼칸 지어내니 / 한 칸은 청풍이요 한 칸은 명월이라”라는 시로 이름난 송순(1493~1583)의 면앙정,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송강 정철(1536~1593)이 머무른 송강정, 주변 경치가 너무 좋아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 등이 있다.
여행이라는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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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방제림 앞 담양천 |
그러니 타인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 것. 오해는 굳이 풀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자주 고맙다는 말을 하자. 세상에는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대신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괜찮다. 담양 대숲을 걸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떠올렸는데, 그 새로운 세상이 바로 나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곳이 담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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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삼지내마을 돌담길 (아래) 진우네집국수 |
덕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8호(25.05.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