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창작자' 증명해야 하는 시대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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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서울 국제도서전 |
“앞으로는 띠지에 ‘챗GPT 한 번도 안 보고 쓴, 100% 핸드메이드 소설’ 같은 문구가 새겨진 책들이 등장하지 않을까요?"
"그 옆 QR코드를 스캔하면 챗GPT 없이 738시간 동안 집필한 과정을 인증하는 영상을 30배속으로 보여주는 거죠. 마치 KS 인증마크처럼요."
20일 서울 국제도서전에서는 소설가 장강명과 가수이자 작가 요조가 ‘매일 수천 편의 장편소설을 쓰는 인공지능(AI)이 나타난다면’을 주제로 AI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 대담을 나눴습니다.
이벤트성으로 여겨졌던 AI의 등장이 바둑계를 뒤흔든 것처럼 '소설 쓰는 AI'의 시대도 머지않았다는 위기감이 출판계 안팎에도 번지고 있습니다. 장강명 작가는 자신의 신간 르포르타주 『먼저 온 미래』가 이같은 미래를 조심스럽게 그려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요조는 인공지능이 ‘팬픽’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지도 모른다며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대외적인 욕망과 개인적인 욕망이 따로 있기 마련, 들키고 싶지 않은 내밀한 취향의 영역도 이를 숙지한 알고리즘의 AI와 함께라면 마음껏 고르고 즐길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창작물을 무한히 생성해주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상상입니다.
장강명도 AI 창작의 생산비 절감 효과를 언급하며 창작에 따르는 비용이 현재의 10만 분의 1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요조의 말대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담을 수 있는 캐릭터 및 스토리라인 설정도 무한 확장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수십만 독자마다의 취향을 정조준하는 수십만 이야기의 대량 생산, 인간이 수작업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작자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 같은 것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내비쳤습니다.
장강명은 “우리는 세상에 없던 소설이나 음악 등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예술가'라는 이름을 붙여왔고, 거기에 경외심을 품어왔다"고 짚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토록 손쉬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에 따라오던 존경심 역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대신 작품에 대한 평가는 훨씬 더 냉정해질지도 모른다고도 전망했습니다. AI가 모든 작품을 데이터로서 평가하고 분석해 "이 책은 다른 책보다 작품성이 32% 뛰어나다"는 식의 정량적 판단도 만연해질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AI가 내 취향에 꼭 맞춰 골라주고 다듬어준 콘텐츠만 소비되는 시대에는 특정 창작물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사실 자체가 관심 밖의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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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그렇다면 인간 창작자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AI와 차별화해야 할까.
"AI는 지치지 않지만, 인간은 지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국 어필할 수 있는 건 '고생'밖에 없지 않겠느냐"라는 요조의 말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이 책을 쓰다 죽었다”거나, “쓰다 너무 극심하게 아파버렸다”고 호소해야만 인간의 책이 겨우 팔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며 AI 시대를 맞는 작가의 우려를 유쾌하게 전했습니다.
장강명은 이런 감정의 일부가 인간 보편의 정서라고도 봤습니다. "고흐의 그림이 더 감동적인 건 그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작곡했다는 배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AI가 인간의 영역을 전부 침범한 사회에서 결국 '실력'의 가치는 퇴색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습니다.
이해를 돕는 예로 든 건 '골때리는 그녀들'과 K리그의 시청률 격차. K리그의 시청률은 1%도 넘기기 어렵지만, 골때녀는 6~7%대 시청률로 승승장구하며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축구 시합이 평생 축구만 해온 실력파 프로들보다 훨씬 더 많이 소비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실력보다 '드라마'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시대가 과연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우려했습니다. "제가 그때 조현병으로 엄청 고생하면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 끊을까 하다 이 해바라기 그렸어요." 고흐가 이런 비극을 대중에 팔아넘겨야만 인정받는 시대가 과연 건강한 모습일지 의문을 던집니다.
두 창작자의 대담 속에서도 'AI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해답은 쉽사리 내리기 힘들었습니다. 장강명은 신간 『먼저 온 미래』도 그런 갈팡질팡하는 사유의 흐름을 담은 책이라고 전했습
장강명은 "이런 시대가 오면 ‘엘레나 페렌테’ 같은 작가는 사라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해온 페렌테처럼 필명만으로 활동하는 창작자는 "AI 아니야?"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고, 본인이 직접 나서 "내가 썼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심가현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