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은 대한민국 재계사(史)에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당시 재계 서열 1위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겪으며 그룹이 5개로 쪼개졌고 재계 서열 2위 대우그룹은 그해에 공식적으로 소멸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2001년 별세한 뒤 정몽헌 회장도 2003년 타계하면서 고(故)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을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 당시의 현대그룹 위세와 비교할 때 규모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1위 자리에 있던 재계 서열 순위가 20위권까지 내려온 것이 현대그룹의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자동차, 중공업 등 알짜 회사들이 계열 분리 당시 줄줄이 떨어져나간데다 현대그룹 핵심이었던 현대건설도 채권단 관리로 넘어간 데 따른 것이다. 현재의 현대그룹을 지탱했던 현대상선은 지속되고 있는 해운업 불황 탓에 실적이 악화되며 그룹 전체에 상당한 타격을 줬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내리막길도 서서히 바닥이 보이고 있다. 계획했던 자구 구조조정안이 원만히 추진되면서 자금난에 숨통이 트였다. 순환출자 고리에 있던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면서 지배구조 개선에도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상전벽해'…재계 서열 1위가 13년 만에 28위로
누구나 현재 부동의 재계 1위는 삼성그룹으로, 이 구도는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에는 현대가 바로 그러했다. 현대는 지난 1977년 이후 무려 23년동안 재계 서열 1위를 지켰다. 현대왕국의 침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이었다. IMF사태 이후 현대는 1998년 한남투신(현 한화투자증권)을 시작으로 한화에너지(현 SK인천석유화학), LG반도체(현 SK하이닉스), 기아자동차 등 8개 기업을 공격적으로 인수했다. 물론 이 중에서는 현대그룹이 사고 싶어 산 회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출마 이후 정치 보복 성격으로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에 현대그룹이 배제되면서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한 성격도 다분했다.
부실기업을 잇따라 떠안으면서 그룹의 재무구조도 급격히 악화됐다. 현대그룹의 부채 규모는 1997년 48조원에서 불과 2년 만에 88조원으로 늘었다. 1996년까지 1조1590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1999년에는 11조3220억원의 적자가 났다.
이렇게 그룹의 경영 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왕자의 난이 터진다. 1999년 말 정기 인사에서 정몽헌 회장과 가까웠던 박세용 현대 구조조정위원장이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전보되면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회장이 이끌어왔는데 갑자기 정몽헌 계열의 사람이 내려온 것이다. 여기에 대한 보복성격으로 2000년 3월 14일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계열의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을 고려산업개발 사장으로 좌천하는 인사를 단행한다. 당시 현대그룹은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공동 회장 체제였다.
이익치 사장의 인사 발표 다음날 정몽헌 회장은 인사보류를 지시했고 곧이어 현대 구조조정위원회가 정몽구 공동회장의 면직을 발표한다. 정몽구 회장의 면직이 발표된 지 이틀뒤 정몽구 회장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주영 회장의 친필 사인이 담긴 "정몽구 회장의 면직은 잘못된 발표"라는 내용의 서류를 공개하며 반격에 나섰다. 다음날 정몽헌 회장측은 정주영 회장의 육성 녹음을 다시 공개하면서 적통 논란을 마무리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전념하고 그룹 경영은 정몽헌 회장에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왕자의 난을 통해 후계 구도가 정몽헌 회장으로 마무리되면서 현대그룹의 계열 분리 작업도 속도를 냈다. 몽(夢)자 항렬의 2세들은 줄줄이 회사를 챙겨 분사했다.
2000년 8월 현대자동차가 계열분리를 공식 신청한 데 이어 2002년까지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현대해상 등이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현대그룹의 중심축이었던 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냈다. 당초 계획은 현대그룹은 건설 부문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지만 현대건설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해 정몽헌 회장은 수 차례 정몽구 회장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몽구 회장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결국 현대왕국을 건설한 현대건설은 2001년 그룹에서 분리돼 채권단 관리 체계로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건설은 2011년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됐다.
이에 따라 2000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자산 기준 재계 서열 1위이던 현대그룹은 2001년 삼성에 1위 자리를 내줬고 2002년엔 13위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지난해 말 기준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는 28위다.
◆자구계획안 마무리 단계…지배구조도 개선 전망
현대그룹이 중형급 기업집단으로 변모하면서 그룹의 얼굴은 현대상선이 됐다. 최근 들어 해운업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현대상선의 재무구조가 악화됐고 현대상선의 부실이 타 계열사로 확산됐다. 현대상선조차도 매각설에 시달릴 정도였다.
현대상선은 지난 2011년 5343억원, 2012년 9885억원, 2013년 7140억원 등 지난 3년간 총 2조2368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여기에 현대상선의 모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도 문제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2011년 267억원, 2012년 493억원, 2013년 986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기순이익으로 보면 2011년 -2613억원, 2012년 -2710억원, 2013년 -3427억원으로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장사가 잘 돼서 영업이익이 났지만 영업과는 관련이 없는 비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2006년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에 대한 적대적 M&A에 나서자 현대그룹은 다수의 재무적 투자자를 백기사로 유치했다. 현대그룹은 이들에게 현대상선 주식을 우호 지분으로 매입하게 하고 주가가 하락해 손실을 입으면 현대엘리베이터가 그 손실을 메꿔주기로 계약을 맺었다. 경영권은 지켜냈지만 실제로 현대상선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현대상선의 주가는 2007년 5만7000원까지 올랐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현재 1만원선에 그치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도 2004년 KCC를 중심으로 한 범현대가와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현대그룹은 다국적 승강기업체 쉰들러와 승강기 사업부 매각을 조건으로 하는 인수의향서(LOI) 계약을 맺고 경영권을 지켰다. 이후 승강기 사업부 매각이 백지화되자 현대엘리베이터는 2대 주주인 쉰들러와 지속적인 분쟁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현대그룹이 지속적으로 외풍에 시달린 것은 그룹 지배구조 자체가 느슨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글로벌-현대로지스틱스-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글로벌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글로벌의 대주주다. 이 중에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현대로지스틱의 지분율은 19.9%, 현대상선에 대한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율은 23.7%로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한 지분율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여기에 지주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선 작업도 그룹 핵심인 현대상선의 연이은 적자로 더욱 멀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지난 17일 현대그룹은 현대로지스틱스 보유 지분 88.8% 전량을 6000억원에 일본 오릭스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현대그룹과 오릭스가 공동으로 SPC(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하고 이 SPC가 현대로지스틱스를 매입하는 구조다.
현대로지스틱스는 그룹의 순환출자 고리에서 지주사격인 현대글로벌과 현대엘리베이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로지스틱스를 매각한 뒤 현대로지스틱스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9.9%를 재매입할 계획이다. 결국 매각 작업이 완료되면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글로벌-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으로 간결해지고 지주사 전환 등 향후 지배구조 개선 작업도 보다 수월해진다.
또 현대로지스틱스 매각으로 유입된 현금을 현대상선 주가 관련
그동안 쉰들러가 현대상선 주가 옵션 상품으로 현대엘리베이터의 실적이 악화된 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온 만큼 옵션 계약이 상환되면 쉰들러의 공세도 다소 진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매경닷컴 고득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