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자·석유화학업계가 과잉·중복설비 해소를 위해 산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발 엔저를 등에 업고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기업들이 구조조정이라는 공격적인 무기까지 동원, 1980년대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던 제조업 영광 재현에 나섰다. 과잉 중복투자로 최악의 위기에 몰린 조선업 구조조정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시바 후지쓰 소니(바이오)가 내년 4월을 목표로 컴퓨터 사업 통합 논의에 들어갔다고 4일 전했다. 이들 3사가 통합하면 컴퓨터 시장 점유율이 30%대 초반으로 높아져 NEC레노버(26.3%)를 제치고 일본 최대컴퓨터 회사가 된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약 6%로 세계 6위 컴퓨터업체 미국 애플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개별 브랜드를 고수하며 좀처럼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던 이들 3사가 컴퓨터 사업부문 통합을 검토하고 나선 것은 컴퓨터 출하량이 계속 줄어들면서 이대로는 더 이상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니혼게이자이는 “통합이 이뤄지면 간접비 삭감과 부품조달 협상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분석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업체들이 핵심 컴퓨터 사업 통합 논의에 나선 것은 과거 수십년 동안 과잉투자와 제살깎기식 경쟁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일본은 1970~80년대부터 10여개가 넘는 전자업체들이 냉장고에서 세탁기까지 백색가전과 컴퓨터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오히려 삼성, LG 등 한국 기업에 밀려 도태되는 상황에 처했다. 경쟁력이 떨어졌지만 사업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베 정권 들어 50% 이상 절하된 엔저 덕분에 실적이 확 개선된 전자업체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빠른 사업전환을 추진하며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부적절한 회계로 휘청이던 도시바는 올해 백색가전 공장을 통합·철수시킨뒤 핵심사업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몰락한 전자왕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소니도 사업성이 떨어지는 스마트폰 사업 등은 대대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사물인터넷(IoT) 영상센서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도시바 영상센서 사업 인수에 나서는 등 게임과 센서 중심으로 재도약에 나섰다. 히타치와 파나소닉은 아예 주력사업을 전자에서 철도 주택 등으로 전환해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히타치는 올해 유럽과 아시아 철도차량 교통시스템 수주에 잇따라 나서면서 턴어라운드에 성공했고, 파나소닉은 자동차부품과 주택사업을 양대 축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샤프는 전자산업 트렌드를 잘못 짚고 한 우물을 파다 생사기로에 서있지만 일본 대다수 전자업체들이 구조조정과 사업전환을 통해 전열을 재정비한 상태다. 일본 재계의 대표적인 중복·과잉투자 산업으로 지목돼왔던 석유화학업계도 최근 3강체제로 재편됐다. 최근 정유 1위와 3위업체인 JX홀딩스와 도넨제너럴이 경영통합을 선언했고, 이에 앞서 2위업체 이데미쓰고산이 쇼와쉘과의 합병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과거 10개가 넘는 업체가 난립했던 일본 석유화학업계는 코스코에너지홀딩스까지 포함해 3강이 경쟁하는 이상적인 체제가 됐다.
전자·석유화학업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은 저출산·고령화로 국내 시장이 축소되는 등 시장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폐쇄적인 일본 국내 소비시장에 안주해왔지만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밀리면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게다가 아베 정권 들어 산업경쟁력강화법을 제정, 세금감면과 행정절차 간소화 등 규제완화를 시행하면서 구조조정을 강하게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일본 공격적인 구조조정에 국내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과거 높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했던 일본업체들이 힘을 합쳐 시장공략에 나설 경우, 저가공세를 펼치는 중국과 더불어 양측에서 협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과거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통합해서 만든 엘피다처럼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미 세계시장에서 밀린 일본업체들이 힘을 합친다고해서 경쟁력이 단숨에 높아지진 않을 것이란
[도쿄 = 황형규 특파원 / 서울 = 송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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