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하→투자 증가→성장률 상승’은 경제 운용의 오랜 철칙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2014년 2.5%에서 1.25%까지 1%포인트 인하했지만 설비 투자 등 실물 경기는 전혀 호전될 조짐이 없다. 대신 단기부동자금만 720조원에서 1000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전세금이 오르고 부동산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가계 빚 규모가 같은 기간 235조원 늘어 1257조원으로 치솟았다. 가계가 저축한 돈을 기업이 빌려 투자와 고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저축한 돈을 가계가 빌려 아파트를 사고 전세금을 내고 있다. 경제가 거꾸로 돌아가는, ‘저성장의 함정’에 빠진 형국이 됐다. 조선·해양 위기에 이어 현대차·삼성전자 갤노트7 사태 등 악재가 연달아 터지고 있지만 정부 정책은 전혀 약발을 먹지 않는, 속수무책인 위기 상황이다.
◆ 화폐유통 속도, 역대 최저
17일 매일경제신문이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8월말 현재 금융권 단기부동자금은 980조75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처음 900조원대를 돌파한 뒤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 올해 1000조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1000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단기부동자금은 현금과 머니마켓펀드(MMF), 양도성예금증서(CD),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만기 6개월 미만의 예금 등 만기가 짧은 금융상품에 투자된 대기성 자금이다. 단기 부동자금이 늘어난다는 것은 한은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해도 기업 등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않고 금융권 대기성 자금으로 남아있는 돈이 증가했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한은의 통화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2014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취임 이후 한은은 기준금리를 다섯 차례에 걸쳐 2.5%에서 1.25%로 인하했다. 그동안 400조원에 달하는 시중 통화량(M2·광의통화)이 늘었지만 실물경기는 꿈적도 않으면서 통화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커진 것이다.
이는 역대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통화 유통 속도’ 및 ‘통화 승수’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통화 유통 속도는 역대 최저치인 0.70을 기록했다. 중앙은행이 공급한 본원통화가 금융기관 등을 통해 몇 배의 통화량을 창출했는지를 보여주는 통화 승수 역시 올해 8월 말 기준 17.03으로 사상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이들 지표는 금리 인하가 기업투자 등 실물경제로 얼마나 이어지는지 효과를 재는 잣대로,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실물경제가 위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도 실물경제에 스며들지 못하는 현상, 이른바 한국판 ‘유동성 함정’의 민낯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최근 발언대에 설 때마다 통화정책 이외에 재정 정책을 강조하거나 구조 개혁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인당 가계빚, GDP 곧 추월
올해 2분기 현재 가계 빚은 1257조3000억원. 문제는 속도다. 전년 동기 대비 11.1% 급증했다. 가계빚 증감률은 전년 동기비 기준으로 2014년 2분기 5.7%에 불과했지만 작년 2분기 9.2%, 올해 1분기 11.4%까지 상승했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1인당 가계빚 규모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앞지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인당 GDP는 2만7633달러. 작년 말 현재 1인당 가계 빚은 2만487달러에서 2분기 현재로는 2만1407달러로 늘었다. 가계빚 증가율은 11%를 넘는데 반해 1인당 GDP는 물가상승률을 합친 명목 기준으로 따져도 5% 안팎에 그친다. 이 속도가 계속 유지될 경우 2021년 1인당 GDP는 3만7030달러, 1인당 가계 빚은 3만8319달러가 된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가계 소득 대비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되면 실질 가처분 소득을 떨어뜨려 내수를 압박하는 것은 물론 양극화 등 사회, 경제 전반에 큰 짐이 된다.
실제로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서 건설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50% 이상이었다. 2분기 GDP 전년 동기비 증감률은 3.3%였는데 이 가운데 건설투자 성장기여도가 1.7%였다. 부동산 반짝 경기마저 없었으면 성장률이 1.6%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반면 올 8월 국내기계수주는 전년 같은 달 보다 3.3% 감소했고 설비투자는 3.6% 증가에 그쳤다. 설비투자 반등은 7월 증감률이 -12.3%로 하락한데 따른 기저효과 탓이 크다. 8월 제조업가동률은 70.4%로 2009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 약발 안 먹히는 통화·재정정책
금리를 내렸는데 단기 부동자금과 가계빚만 크게 늘고 기업 투자는 늘지 않으면서 한국경제가 일명 ‘정책무력성의 명제(policy ineffectiveness proposition)’에 빠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기준금리를 낮춰서 통화 팽창 정책을 펼칠 경우, 돈 흐름이 빨라지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기업이 고용을 늘리고, 덩달아 명목 임금이 상승하게 되는 데 이같은 선순화 구조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특히 통화정책은 무용론이 나온지 오래다. 전 세계적으로 불확실성이 워낙 크다보니 통화공급량을 늘려 돈을 풀어도 기업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부동자금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달 “세계 성장 둔화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한국, 캐나다, 독일 등 재정 여력이 남아있는 국가들이 세계 공공 인프라 구축과 다른 부문에 투자를 늘리는 등 더 적극적으로 정부 재정 지출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여력이 있는 국가는 재정 지출을 늘리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감세에 나서 전 세계적으로 경기 둔화를 막자는 것이 라가르드 총재의 견해다.
하지만 문제는 확대재정정책을 펼쳐도 예전만큼 위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지출을 늘린 만큼 민간 투자가 위축되는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 재정승수를 0.498로 계산한 바 있다. 과거엔 0.8에 달했다. 정부가 지출을 1만원 증가시키면 예전엔 국민 소득이 8000원이 늘어났는데 지금은 4980원 늘어난다는 뜻이다. 재정을 투입해도 경제가 그만큼 회복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경제학자들은 유효수요 자체를 직접 늘리거나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단기적으로 경기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면서 규제 혁파를 해서 투자
[이상덕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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