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99, 면회’(감독 김태곤/ 이하 ‘면회’)의 동갑내기 세 주인공 김창환 심희섭 안재홍(26)은 기대 이상의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사람의 영화 속 이미지가 꽤 강렬(?)했기 때문이다. 어벙벙한 꽈배기 더플코트와 덥수룩한 헤어스타일. 어수룩하고 촌스러운 스무 살의 풋내를 어디에 감춘 것일까. 맞은 편 의자엔 스물 여덟의 매력적인 남자 셋이 앉아있었다.
세 사람은 ‘면회’로 지난해 열린 제 16회 부산국제영화제 젊은 배우상을 나란히 수상한 데 이어,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 오사카 아시아 영화제에 이르기까지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안재홍은 “부산국제영화제는 내 꿈이었다”며 “(내가)부산 출신인데 영화제를 볼 때마다 언젠가 내가 주연한영화가 출품되길 굉장히 바랐다. ‘면회’로 그 꿈을 이뤘다”고 했다. 이어 “또 로테르담국제영화제까지 초청돼 배우로서 누릴 복을 일찍 누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심희섭은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신선한 충격”이라며 “한국의 군대 문화가 생소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관객의 수준은 이를 뛰어넘더라. 90년대라는 과거 코드와 스무 살 청년들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즐겁게 봐줬다”고 전했다.
또 “관객층이 다양해 놀랐다”며 “한국에서 우리 영화의 주된 관객층은 20-30대인데 네덜란드 현지 관객들은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했다. ‘다양성 영화’라는 말로 특별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화 중 하나로 인식하는 듯 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영화만 18번 정도 본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인정해주시고 찾아주시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죠. 한 영화로 꽤 오래 우려먹죠?”(안재홍)
‘면회’는 스무 살 세 남자의 1박 2일에 관한 영화다. 상원(심희섭)과 승준(안재홍)은 고교 졸업 후 1년 만에 군 복무 중인 민욱(김창환)을 보러 철원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다. 이유는 다름 아닌 민욱의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 편지를 배달하기 위한 것. 하지만 이를 쉽게 전할 수 없는 승준과 상원은 면회 하루 동안 민욱의 눈치만 살핀다. 한편 상원은 면회지에서 우연히 만난 다방 여종업원 미연에게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스무 살 풋내기 세 사람은 그날 밤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을 톨해 처음 만났다는 세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실로 엄청났다.
“처음엔 좀 못마땅했어요. 저랑 재홍이가 먼저 캐스팅됐고 희섭이가 마지막으로 합류했죠. 그때 희섭이의 첫인상을 보자마자 저희 둘이 ‘쟤 좀 의뭉스럽다’며 곱게 안 봤었죠.”(김창환)
“상원 역 확정 통보를 받는 자리였어요. 이후 벌어진 술자리에서 이 친구들과의 화합이 기대됐어요. 술 좋아하는 동갑내기들이 만났으니 말 다했죠.(웃음) ‘어떻게 이렇게 모였나’ 싶을 정도로 궁합이 잘 맞았어요.”(심희섭)
영하 36도를 밑도는 혹한과 싸우며 세 사람은 똘똘 뭉쳤다. 영화 촬영 기간은 단 12일. 철원 신수리 마을회관에서 합숙하며 부족한 부분을 서로 매우며 완성도를 높였다.
안재홍은 “촬영 당시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다”며 “극중 선임 역으로 출연한 형이 주먹밥을 만들어줬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는데 알고 보니 김 보존제까지 넣어 만든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배탈은 나지 않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피소드도 사람을 닮는 것인지 이야기마다 유쾌함이 뚝뚝 묻어났다.
‘면회’는 배우들의 주옥같은 연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신인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에 이 같은 찬사가 쏟아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희섭은 ‘면회’로 첫 영화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나 전공(경기대 연극영화학과)을 통해 꾸준히 연기 경력을 다져온 준비된 신인이었다.
무엇보다 영화가 빛을 발한 것은 탁월한 캐릭터 분석능력 덕분이었다. 극중 표면적으로 ‘절친 3인방’이라 불리는 세 친구들은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서로 감춘 채 1박 2일이라는 시간을 채워나간다. 하지만 어수룩한 스무 살 남자들의 긴장감은 사춘기 소녀들 무리에서나 느낄 법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민욱은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믿어요. 셋 중 가장 먼저 군 입대를 했고 여자 친구도 있기 때문에 ‘난 너희들보다 성숙해’ 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사실 어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어려요. 민욱이 겪는 성장통이라면 그릇된 자기 인식이 아닐까 해요. 어른으로서 자기 기대치만 높지 사실 어른이 아니니까 자꾸만 낙담하는 거죠. 물론 그 과정이 어른이 되는 길이겠지만요.”(김창환)
“승준의 경우는 전형적인 갈대 타입이랄까요. 줏대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냥 남들이 좋다니까 좋은 줄 아는 거죠. 하지만 면회 1박 2일 동안 입시를 위해 마련했던 카메라를 잃어버리게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음으로써 예전과는 달라져요. 물론 승준은 드라마틱하게 변할 타입은 아니지만 관점이 조금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안재홍)
“제가 뭔가 제일 많이 잃은 것 같은데.(웃음) 상원은 동정을 잃고, 그 때문에 돈도 엄청나게 잃게 되죠. 사실 두 친구들보다 여러모로 잘났는데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어려요. 겉보기만 똑똑하지 속은 완전 허당이에요. 그래봤자 스무 살이잖아요. 딱 그만큼 서툰 남자 애에요.”(심희섭)
김창환은 “민욱은 분별력있는 캐릭터”라며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기 때문에 미연을 잠깐의 일탈로 생각한다. (사랑의)대상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다. 친구들 중 가장 성숙하다”고 했다.
이에 심희섭은 “미연은 풋사랑이었다”며 “친구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지만 상원은 모든 게 처음인 친구다. 그러니 천지분간 못하고 미연을 사랑할 생각부터 하지 않던가”며 흥분했다. 이어 안재홍은 “승준은 상원만도(?) 못하다”며 “미연은 그저 야한 옷을 입은 여자일 뿐 어떤 감정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대상이랄까. 그러니 밖에서 강아지랑 놀고 있었지”라며 웃었다.
‘면회’는 이제 막을 내린다. 오는 31일 마지막 GV 행사 후 상영관에서 더는 만날 수 없다. 관객들과의 마지막 면회를 앞둔 이들을 이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 세 사람이 다 같이 연극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저희 세 사람의 호흡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아직 한국 연극엔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으니까 작품 선정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말하고 나니 당장이라도 작업하고 싶네요.”(심희섭)
“희섭이가 연극 연출을, 재홍이도 단편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어요. 다양한 경험이 많은 이 친구들과 제 몫이 합해진다면 뭔가 재밌고 대단한 게 나오지 않을까요?”(김창환)
“뭐니 뭐니해도 저희 세 사람은 연기하는 게 가장 즐거워요. 최근 홍상수 감독님의 신작 ‘우리 선희’에서 제작부를 했었는데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다함께 작품을 하는 게 제 새로운 꿈 중 하나예요.”(안재홍)
‘될 성 부른 나무’로 멋지게 신고식을 치른 이들이 충무로라는 토양에 깊게 뿌리 내리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나가길 기대해 본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염은영 인턴기자/ 사진 팽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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