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박정선 기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감사한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북한에 가서 이틀만 살아보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생활고를 겪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탈북에 성공한 이들이 한국의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미디어들도 이들을 주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별친구’ 등 TV프로그램부터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 등 영화까지, 탈북자를 다룬 콘텐츠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 이순실 씨의 방송활동. 사진=이순실 제공 |
북한 간호장교 출신의 탈북자 이순실 씨도 최근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빼어난 입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씨는 어렸을 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군인 아버지와 군단장 요리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대물림의 직업이 우선인 북한에서 형제 모두가 군에 입대해 조국보위초소에 섰다.
“나는 11년 동안 군복무를 하면서 간호장교로 성장했다. 1991년 4월 만기 제대했는데, 잘살고 있던 우리 집이 엄청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부모님은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오빠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면서 간간히 생활을 유지했다. 막내 동생은 행방불명이었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었다.”
부유한 집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던 이 씨는 제대와 동시에 북한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40월의 제대비를 받았지만 당시 쌀 1kg에 125원 하던 시절이었고, 그 돈의 가치는 형편이 없었다. 일명 ‘꽃제비’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전전하며 번 돈으로 강냉이 가구를 사고, 들판으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풀뿌리, 나물, 산열매로 목숨을 부지했다.
압록강 주변에서 살던 그녀는 중국으로 드나드는 꽃제비들과 밀수꾼을 보게 됐다. 처음에는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 땅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압록강에서 전염병과 추위, 굶주림을 이겨내며 살았다. 하지만 이 씨는 동료 꽃제비가 중국에서 빵과 밀가루를 얻어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살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탈북을 시도하다 8번 북송당하고 9번 만에 성공을 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탈북에 성공한 그녀는 지금 방송에 출연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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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찾기 위해 방송에 출연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를 통해 출연 요청을 받았고, 방송이 나간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보내주더라. 내가 당한 아픔들과 슬픔, 설움만이 아닌 현재 북한에 남은 우리 부모형제들의 몫을 다 합하여 북한의 살인정치, 공포정치를 반대하며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이 몸이 늙어 지팡이 신세가 되어도 아직도 못 다한 북한의 현실들을 속속히 꺼내 고발할 생각이다.”
방송 출연으로 인한 북의 위협이 걱정됐다. 열 번 정도의 시도 끝에 어렵게 탈출한 이 씨는 그럼에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신변의 위협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북에서는 한 장의 사진을 유튜브에 올렸다. 사진 속에는 남자 7명과 여자 1명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 여자가 바로 이 씨였다. ‘꼭 저승에 보낼 것’이라는 메시지도 첨부됐다.
“사실 처음에 그 메시지를 받고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왕 시작한 일인 만큼 마음을 다잡았고, 이젠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북한에 있는 오빠도 나 때문에 혁명화구역으로 쫓겨나갔다. 그렇다고 나까지 숨어살면서 입을 다물고 싶지 않다.”
↑ 이순실 씨 봉사활동-강연 모습. 사진=이순실 제공 |
사실 이러한 이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나라로써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또 형제간에 다툼이 잦았다. 옷 한 벌, 밥 한 사발을 두고 의리를 끊을 정도로 생계에 있어서 치열한 곳이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나, 그리고 방송에 출연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 지금도 일어나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감사한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북한에 가서 이틀만 살아보라’고 말해보고 싶다.”
이 씨는 탈북한 뒤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한국’은 한 마디로 ‘천국’이었다. 생활고부터 시작해서 탈북을 위해 힘들 길을 걸어오다 한국에 정착한 그녀는 많은 것들에 있어서 달라진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봉사할 수 여유가 생겼으며, 감사와 사랑을 배웠다. ‘먹고 살기’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일하는 것이 그녀에겐 행복이었다.
“참 많이 달라졌다. 항상 겸손해야한다는 것이 습관화됐다. 이전에 난폭한 언어와 행동들이 없어지니 친구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놀라더라. 촬영과 라디오 방송진행, 안보강연, 간증집회들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들을 알려주었다. 내가 40년 동안 그 광야에서 노예처럼, 또 거지처럼 살았지만 이제 열심히 봉사하며 남을 돕고 사는 것을 배웠고, 감사와 사랑도 배웠다. 북한에서 배운 조폭 같은 정신, 나가자 혁명정신은 이젠 버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