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
“어디에 갔다 놔도 잘 어울린다고요? 바꿔 말하면 너무 무난해 개성이 없다는 건데…저의 가장 큰, 그리고 오랜 고민이기도 해요. 연기 13년차, 그리고 나이 서른. 이제 진짜 이윤지를 보여줄 때도 됐는데 말이죠.”
그야말로 이윤지(30)의 재발견이다. 그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내공이 제대로 진가를 발휘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눈치다. (이런 욕심쟁이! 우후후훗!)
최근 연극과 드라마를 모두 성공리에 마친 그녀를 만났다. 연극 ‘클로저’에서는 자유분방한 뉴욕 출신 스트리퍼 앨리스로,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에서는 꿈을 찾아 선생님을 그만둔 작가 지망생이자 사랑엔 완벽한 ‘쑥맥’인 광박이로 분했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는 정말 겁을 많이 냈던 것 같아요. 문영남 작가님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 일단 긴장이 됐고, 연극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양쪽에 누를 끼칠까봐 부담감이 컸어요. 감정 조절은 물론 체력 관리에도 소홀할 수 없었죠.”
이윤지는 막 서른이 된 또래배우 중 단연 돋보이는 연기파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자기 옷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워낙 다양한 캐릭터를 빈틈없이 소화해왔기 때문에 다소 색다른 변신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윤지’라는 반응. 헌데 그녀도 남모르는 고충이 있었단다.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클로저’ 그 안의 ‘앨리스’. 이미 문근영씨 등 스타들이 거쳐 갈만큼 배우라면 모두가 원하는 스테디셀러라 너무 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이번엔 또 문영남 작가님의 작품이라니. 두 작품 모두 어떻게든 꼭 해내야만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서로 윈-윈이 됐죠.”
이윤지는 ‘클로저’에서 사랑에 목숨까지 거는 열정적 떠돌이 스트리퍼 앨리스 역을 맡았다. 그간의 지적이고 똑 부러지는 이미지와는 상반된 캐릭터.
“초반 앨리스 도전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 안에 분명 ‘앨리스’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남들은 모른 내면의 상처라든지 겉보기와는 다른 여린 감성이라든지…진짜 어른이 된 듯한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뭉클함? 제 안의 다양한 고민들이 ‘앨리스’를 만나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낸 것 같아요. 숨겨야 했던 나를 표출 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캐릭터에 대한 고민과 애정 덕분이었을까. 이윤지는 트리플 캐스팅 안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한 층 과감하고 성숙한 연기로 일각의 우려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키스신 등 농도 짙은 애정신과 노출, 거침없는 대사 역시 제 모습마냥 소화했다.
뿐만 아니다. 연극과 병행해야 했던 ‘왕가네 작가’ 속 캐릭터 역시 이전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특기는 개 짖는 소리와 애교 넘치는 콧소리내기. 처음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호된 시집살이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사랑에 있어서는 결국 두 캐릭터 모두 솔직하고 용기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광박이’이의 적극성은 좀 배우고 싶어요. 순수한 감성과 넘치는 애교, 경계심 없이 나를 내던질 수 있다는 게 참 부럽더라고요. 사실 그렇게 사랑하기가 쉽지 않잖아요.(하하!)”
의외로 그녀는 스스로 사랑에 다소 비관적(?)이라고 했다. “상대에게 너무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더 절실히 깨닫게 된 것 같아요”라고 운을 뗐다.
“‘사랑’에 대한 환상은 없는 편인 것 같아요. 두 작품을 통해 더 그 생각이 확고해졌는데, 상대에게 너무 의지하면 안되는 것 같아요. 너무 단단한 상태로 상대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너무 의지하면 그 사랑을 건강하게 지킬 수 없는 것 같아요. ‘앨리스’와 ‘광박이’를 통해 그 사이의 적절한 수준이 뭔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두 캐릭터 모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선택한 것 같아요. ‘무난하다’는 평가가 바꿔 말하면 ‘개성이 없다’는 건데, 배우로서 저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하거든요. 좀 더 강렬한 변신을 통해 스스로 깨고 싶은 욕심이 있던 것 같아요. 나를 좀 더 걷어내고 싶다는 생각?”
반짝이는 그녀의 눈이 한층 또렷해졌다. 이어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무난한 옷을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지만, 한 눈에 딱 들어오는 강렬한 스타일을 원하기도 하잖아요? 어디에 갔다 놔도 그저 ‘어울림’으로 끝나는 ‘가구’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죠”라고 털어놓았다.
의외였다. 어떤 작품이든 흔한 ‘악플’이나 잠깐의 ‘연기 논란’도 없었던 그녀이기에 이 같은 고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처음엔 그저 겸손한 소리이거니 싶었는데 이내 진지함이 묻어났다.
“정신없이 보낸 6개월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제 연기생활 10여년을 동안 겪은 것 이상으로 많은 걸 배우고, 조금은 여유도 찾게 된 것 같으니까요.”
“‘왕가네’에서 제가 가장 크게 얻은 건 ‘사람’과 연기에 임하는 ‘바람직한 자세’예요. 이번 작품은 그 어떤 때 보다 배우들 간 호흡이 좋았고, 누구 하나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베테랑’ 선배님들과 대화하고 연기 호흡을 맞추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어요. 그저 정석대로,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죠.”
스스로 ‘평균치 스팩트럼’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이윤지. 그녀가 또래 배우들 사이에서 유독 강한 ‘신뢰감’을 주는 배우로 성장한 데는 이 같은 진지한 고민과 겸손한 태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가네’ 마지막 방송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무대로 치면 ‘커튼콜’ 같은 느낌?. 너무 사랑했던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 그리고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토닥이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확실한 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는 거예요. 긴 여정을 달려온 만큼 오랜만에 달콤한 충전의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해요. 다음에 만날 땐 분명히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이겠죠? 기다려주세요. 화이팅!”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