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수영 인턴기자]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만 군림한다.”
러시아 울란우데 국립 오페라 발레극장 지휘자인 노태철(53) 지휘자의 말이다. 동양인 최초로 ‘비엔나 왈츠 오케스트라’와 ‘프라하 모차르트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했고 모스크바 심포니, 토론토 필하모니, 헝가리안 심포니 등 세계 100개 오케스트라와 600회 이상의 음악회 지휘를 한 그는 러시아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지휘자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노 지휘자는 러 울란우데 오페라 극장 단원들을 이끌고 한국을 찾았다. 지난 9일 그는 재능 기부 차원에서 강원도 영월 청소년 수련관에서 청소년 음악회를 선보였다.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가 영월의 작은 청소년 수련관을 찾은 까닭은 무엇일까. 노 지휘자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변화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에요”라고 했다.
이미 20번 이상 영월을 방문한 노 지휘자는 ‘클래식이 좋아요’ ‘또 듣고 싶어요’ 라는 학생들의 말을 들을 때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1999년도에 전라북도 40개 학교 투어를 진행한 바 있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행복을 나눌 수 있다면 학교 강당, 군부대, 산사, 카페 등 장소를 불문하고 단원들을 이끌고 찾아갔다. 영월 군수에게 오케스트라를 만들자는 제의를 할 정도로 음악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이다.
◇고려인 동포에 대한 남다른 시선
음악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 넘치는 노태철 지휘자는 2000년에 처음 러시아에 진출해 지휘 활동을 하며 많은 고려인 동포를 접했다.
노 지휘자는 당시 고려인 동포들이 대부분 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택시 기사를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에 그는 고려인 동포를 자신의 오케스트라 공연에 초청해 관람하게 했다.
“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택시 기사를 하는 고려인 동포들도 공연을 관람하러올 때는 정장을 차려입고 오죠. 러시아에는 많은 고려인 동포들이 있는데 고려인 동포들에게 우리는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그는 “고려인 동포들이 점차 러시아 사회에서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을 보며 자부심을 느꼈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다문화 고려인 동포도 공연에 지속적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 지휘자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든든한 고국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며 그들의 격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다.
◇음악 인생의 첫 출발 그리고 교수 시절
경남 합천에서 3남 1녀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학창시절 합창단을 하며 음악을 접했고, 그 시절부터 기타 등의 악기를 친숙하게 다뤘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대학을 떨어지고 나서 부터다. 다소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지만 열정만큼은 그 누구보다 넘쳤다.
“번번이 대학에 떨어지고 음대에 지원했고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에 입학했어요.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이 좋아 작곡 등 공부에 집중했고, 그 결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됐죠.”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이론 위주의 한국 교육 방식이 실력 위주의 유럽에서는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노 지휘자는 중학교에서 짧은 교직생활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유럽과 러시아를 주 무대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갔다. 이 와중에 2009년 러시아 체류 시기, 평택대학교로 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학교 오케스트라를 살려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결국 교수 자리를 승낙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20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보였다. 학생들의 밤샘 연습에 교수실도 개방하고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빌려주는 등 열과 성의를 다해 교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부딪혔다. 노 지휘자는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했지만 다른 교수들이 싫어했고 반대했다”고 말했다.
교수가 되고 나서 자신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현실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주위에서 교수라며 저를 떠받들고 선물공세가 이어졌죠. 그래서 교수라고 불리는 것도 싫었어요. 지나치게 대우하는 구조가 변화돼야 합니다.”
노 지휘자에게는 허례허식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월로 향하는 길에도 러시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컨디션과 기분을 꼼꼼히 챙겼고 한국 음식이 맞지 않을까 낯선 타지에서 힘들지 않을까 귀 기울이는 그였다.
“지휘자가 권위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있을 때면 지금까지도 심부름 등의 일을 도맡아 해요. 지휘자는 무대에서만 최고 권위자일 뿐이에요. 무대 밖에서는 단원과 똑같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이기에 교수 생활을 하면서 고민에 빠졌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대학에 사표를 제출했다. 노 지휘자는 앞으로의 음악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을 봤을 때 교수 생활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수 생활을 계속 했다면 물론 편했겠죠. 하지만 저는 음악이 하고 싶었어요. 교수생활은 길어야 15년 정도 더 할 수 있겠지만 지휘는 40년 더 할 수 있어요. 앞으로 남은 40년 동안 음악을 할 겁니다”
그는 10년 정도는 유럽과 러시아에서 지휘활동을 하며 공부하고 30년 동안은 지휘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지휘자라는 지위에 어깨가 무거울 만도 하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가시밭길을 걸어왔지만 “지휘를 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했다. 현재의 노 지휘자의 모습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지휘자는 능력에 따라 뿜어낼 수 있는 음악이 무궁무진하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도 다르고 악기도 저
자유롭게, 치밀하게 음악에 대해 연구하는 노태철 지휘자는 앞으로도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이것들은 단기간 내에 이룰 수 없기에 지금도 그는 감동을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