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유장영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완도항에서 주도까지 왕복 수영을 즐겨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멀리서 보면 하얀 팬티만 보였다고 했다. 새카맣게 탔단 이야기다. |
배우 유장영(32)은 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단순히 여행자가 아닌,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그에게 완도는 어머니나 다름없다. 그는 "고향을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애달프다.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 사진2) 완도항 방파제길. 제방둑 왼쪽과 오른쪽의 물살이 확연히 다르다. |
↑ 사진3)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28호인 주도는 천연 상록수림의 보고다. 소나무, 붉가시, 광나무, 황칠, 후박, 동백 등 137종이 서식하고 있다. |
↑ 사진4) 완도여객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장영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그대로 있다. |
■ '청년' 유장영의 노래 : '나는 나비'(YB)
↑ 사진5) 완도 문화예술의전당 앞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유장영. |
그렇게 상경 6년 만에 그는 악극 '모정의 세월'에서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정식으로 꿰찼다. 이 공연으로 그는 고향인 완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무대를 마치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극 중 시대적 배경이 달랐지만 내가 살아온 모습과 상황이 매우 비슷했다. 지금 불효 중인 것도 똑같다. 배우로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니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내 앞에서 만큼은 항상 강한 분이시다."
↑ 사진6) 유장영은 지금도 집에 가면 가게 일손을 돕는다. 가게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있는데 대부분 그에게 일을 배운 이들이다. |
그러던 어느날,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고 싶은/ 노래하며 춤추고 싶은/ 나비(YB '나는 나비' 가사 인용)가 됐다." 아마추어 밴드 '등대지기'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잘 하진 못했지만 늘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던 그다. 지난 2005년 KBS 대하사극 '해신' 청해포구세트장이 완도에 생기면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 사진7) 밴드 등대지기 연습실과 완도청해포구세트장에서의 유장영. |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워낙 시골이라 감히 꿈꾸지 못했을 뿐, 자신이 무대 체질이라는 것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극 무대를 누비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나비'를 들으면 힘이 나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가 막 끓어오른다."
■ '배우' 유장영의 노래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버즈)
↑ 사진8) 완도타워에서의 풍경들. |
어둠이 깔릴 무렵 높은 곳에 올라와 고향을 내려다보는 유장영의 눈빛은 빛났다. 그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했다. (여행 훗날, 영화 '어우동'의 개봉관 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영화 대본을 끌어안고 잘만큼 애착이 컸다)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다. 그는 "이제 배우 생활 2~3년밖에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멀리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연예인'이 아닌,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는 밴드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배우 유장영의 노래'로 꼽았다. "되짚어 보면 학창시절 공부를 못해서 이제 끊임없이 배우는 것 같다. 지금도 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 꿈을 찾아가는 여행 중이다. 여러 시간과 상황 속 많은 산과 바다처럼 인생 굴곡이 있겠지만 그 여행을 즐기겠다."
↑ 사진9) 정도리 구계등은 통일신라시대 황실의 녹원지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다. |
자동차 안, 버즈의 노래가 울렸다.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소금 같은 별이 떠 있고/ 사막엔 낙타만이 가는 길/ 무수한 사랑 길이 되어 열어줄거야/ 낡은 하모니카 손에 익은 기타/ 유어 멜로디.' 경쾌한 기타 사운드와 드럼 비트 속 포효하듯 노래하는 유장영의 목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 '사람' 유장영의 노래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김광석)
↑ 사진10) 이십 여년 전 친구들과의 추억(사진 오른쪽)을 떠올리며 완도항 등대 앞에서 포즈를 취해본 유장영. |
"시쳇말로, 사람이 됐다." 아버지를 여윈 술 취한 친구의 부탁을 듣고 오밤중 공동묘지를 갔으나 산소를 찾지 못해 묘비마다 절을 하고 다녔던 사연 등에서 그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단점이 없다는 것. 그것이 싫다"고 흉을 보던 한 친구는 "장영이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 늘 진심으로 대한다"며 꼬인 혀를 풀었다. 인기 개그 코너 '극한 직업' 상황극을 벌이던 유장영의 매니저는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더니, "연습하느라 쉬는 시간에도 잠을 안 자는 배우"라는 게 그 이유였다.
취기가 흥을 삼킬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면서 노래 한 자락을 뽑았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중략 /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고(故)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다.
"생뚱맞게 젊은 친구가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느냐 할 수 있는데 난 김광석 노래 향기가 좋다. 이 노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우리 부모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내 삶, 친구의 삶, 우리 부모의 삶이 다르지 않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행복, 웃음과 눈물이 있다. 그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따뜻한 배우가 되고 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사람들이 일상에 지쳐 있을 때 날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배우라면 좋겠다."
■ 진주를 닮은 배우 유장영..그리고 어머니의 마음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니 햇살이 눈부시다. "으디쯤이냐잉" 수화기 넘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유장영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는 완도항 근처에서 수산물 도소매업을 한다. 귀경길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재촉했다. 고무장갑과 장화 차림의 어머니에게서 김이 뿜어져나오는 추운 날씨였다. 어머니는 전복과 김을 우리에게 한아름씩 안겼다.
"사실 장영이 미워서 안주까 했는디, 지가 하고 싶은 거 잘 밀어주지 못혀서 미안스럽기도 하고 안쓰러워서 줘요잉. 서울 올라가서 실컷 드쇼" 어머니 눈시울이 붉다. 손사래를 치는 일행에게 "나 듣도 보도 몬한 욕 잘해. 벌써 저놈(유장영)한테는 몇 번 했다"며 웃음기 머금은 화를 냈다.
"못난 아들이어서 죄송하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못나진 않았다. 서울 올라가기 전 가게 앞에 여고생들이 엄청 찾아와서 편지와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며 그를 또 슬쩍 치켜 세웠다. "우리 때는 그랬다. 먹고 살기만 바빠서 그것이 재능인지 뭔지 잘 몰랐다"는 게 어머니의 말이다. "난 그냥 30년이 넘도록 이 장화를 못 벗고 있소." 아이들 어렸을 때 제대로 돌볼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껏 별 사고 없이 커준 자식들이 고마울 뿐이다. 본인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는다.
"싸게싸게(빨리빨리) 가라"면서도 어머니는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다 살피면서 조심히 가란다. "길가에 꽃이 피었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잡초에 걸려 넘어지면 오히려 보듬어주라"고도 했다. 유장영은 "서울에서 혼자 많이 울고, 혼자 많이 걸은 적도 있다. 하지만 감히 내가 힘들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조개와 달리 전복 속 진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똑같은 색깔도 없다. 완도의 배우 유장영은 전복 진주를 닮았다. 내면은 잘 다듬어졌다. 영롱한 진주는 하나의 상처에서 만들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이를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상처를 보듬고 감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했다. 작품에 따라 각기각색의 빛을 발하는 팔색 매력의 배우 유장영을 주목해야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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