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좀 앉아도 될까요?”
다리를 고쳐앉은 유아인(28)은 에너지가 넘쳤다. 며칠째 강행군인 인터뷰 일정에도 눈은 빛났다. 가무잡잡한 피부엔 윤기가 흘렀다.
지칠 만도 한데, 질문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다했다. 매번 답은 길어졌고, 그럴 땐 “너무 길었죠?”하며 개구진 웃음을 터트렸다.
“제 에너지의 근원요? 열등감이 제 힘의 원천 중 하나에요. 열등감, 피해의식, 자격지심. 그런 것들이 저를 엄청나게 괴롭히죠. 결국 그것으로부터 유연한 방식으로 솔직해지기도 하고요. 제 별명이 엄유연이에요. 하핫!”
청춘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 당당한 배우는 자신의 속내도 아낌없이 내보였다. 천만 배우의 입에서 나온 농담에 가까운 진심이었다.
유아인은 요즘 숨 돌릴 틈 없이 ‘사도’(16일 개봉)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 새끼 졸라 싸움 잘해”란 황정민의 대사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엔 송강호와 함께다.
‘사도’는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정통 사극. 조선시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 이야기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송강호가 영조 역을, 유아인이 소년부터 성인이 된 사도세자의 10여년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비극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부자의 불통에 대해 풀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개봉 4일 만에 200만을 넘었고, 천만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분위기다. 그러면 유아인은 만 28세에 ‘쌍천만’ 배우가 된다. 너무 버거운 영광이 아닐까, 그를 만났다.
“(내 휴대폰 좀 줄래?) 민규동 감독님이 주신 건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정확히 봐야 해요. ‘최고였다’고 내가 바꿀 수 있으니까.(웃음) ‘너무 아름다웠어. 네 청춘. 빛이 난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지만 오래 전부터 친분있는 감독님이신데 제 청춘에 대한 평가를 해주셔서 좋았어요.”
-‘사도세자’는 생경한 인물이나 허구의 인물이 아니죠. 역사 속에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래서 연기하기가 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기질에 대해 생각했어요. 저랑도 닮았는데,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요. 심지라면 심지, 객기라면 객기, 치기라면 치기 혹은 나름의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 힘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 인물에게서 찾아서 저한테 일치시키는 게 아니고, 이 인물을 보고 제 안의 성분들을 끄집어내서 조합을 해 캐릭터를 탄생시켰어요.”
-이를테면요?
“영화 중 이런 대사가 나와요. 제가 연기하진 않았지만 ‘1년에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몇 번 있느냐?’ ‘네, 한두 번 되옵니다’ ‘솔직해서 좋다~’ 결국엔 사도세자란 인물이 세자의 자질은 불충분했고 세자로서 책임은 조금 멀리했으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세상 속에 던진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 거죠. 아빠가 왕인 상황에서 ‘당연히 세자가 돼야 하는 것인가?’ ‘왜 나는 다른 것은 될 수 없는가’는 질문을 던졌을 거라 생각해요. 어찌 보면 한 명의 청춘이 가질 수 있는, 세상에 품을 수 있는 의문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억울하게 죽게 돼요. 연기를 하면서도 ‘참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나요?
“억울하다기 보다 연민이 있었죠. 굉장히 큰 연민요. 안타까움도 있었고요. ‘조금 더 여우같이 굴지’ 이런 거요. 어릴 때 어른들이 하던 말처럼 ‘야, 세상이 그런 거야. 둥글둥글하게 해’ 그게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결국 뒤주에 갇혀 죽는 것보다 어차피 세자일 거라면. 저잣거리의 청춘한테는 절대로 그런 안타까움과 그런 말은 안 할 거니까요. 네가 어차피 세자일 거고 왕이 될 거면 ‘조금 더 발톱을 숨기지’ ‘아빠 말 듣는 척 좀 하지’ ‘척 좀 하면 되는 것을’... 제가 역사상의 실제 사도세자에게 무슨 훈수를.(하하하)”
-뒤주에서 죽어가는 촬영은 고생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찍었나요?
“사실 기술력이 필요했죠. 감정신이라기 보다도 상태, 컨디션을 기술적으로 만들어야하니까. 뒤주 안에 8일 동안 갇혀 있는 그 컨디션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런데 뒤주 안 심리 상태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면면들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끼니를 거른다거나 일부러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나요?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웃음) 그 신만 찍는 게 아니니까. ‘저기요~ 쉐딩을 조금 더 넣어주세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죠. 하루하루 시들어간다, 그래서 마지막엔 입도 벙긋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잡아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영화 오프닝이 인상적이었어요.
“되게 힘 있는 오프닝 시퀀스였죠? 액자식 구성으로 뒤에 걸 앞으로 당겨와서 보여준 건데, 원래 시나리오에선 그게 아니었죠. 영화가 전반적으로 덤덤한 편이에요. 감정은 세지만 기술적인 화려한 멋은 부리지 않았잖아요. 영화 테크닉적인, 카메라 테크닉적인 기교도 부리지도 않았고요. 정말 우직한 스타일의 영화다보니까 영화적인 안배를 한 것 같아요. 이게 역사 스페셜이 아니고 상영관에 걸려야 할, 티켓이 팔려야 할 영화다 보니. 저도 비가 막 내리고 있고 음악이 나오고 있는 그 구간이 아주 한국적으로 힘 있는 오프닝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담이 안됐다고 하면 조금 건방져 보일까요. 하하. 근데 많이 부담스럽진 않았어요. 워낙 계속 선배님들과 해왔었으니까요. ‘내가 선배님을 이겨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작품에 임한 게 아니니까요. 그냥 연기하는 거고 내 파트너인데 더 좋은 거죠. 더 유명한 배우가 내 앞에 있어주는데 얼마나 좋아요. ‘(선배님으로부터) 뭘 보게 될까, 난 어떤 순간을 보게 될까’ 그런 흥미로움, 흥미진진함, 기대감을 갖고 했어요.”
-그래서 어떤 순간, 뭘 봤나요?
“세밀함, 폭넓음에 대해 배운 것 같아요. 연기하는 그 순간에 가진 배우의 집중도,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작품 전체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요. 배우의 능력치라는 게 대사 한 마디, 연기 조금 잘 한다고, 감정 조금 진심이었다고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아요. 주연배우의 연기력이란 매순간 어마어마한 집중으로 연기를 해내는 것과 결국 전체 안에서 균형감 있게 매순간을 컨트롤 하고 안배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조금 어긋날지언정 아주 순발력 있게 명확한 대처로 다른 순간들에서 그 빈틈들을 메워나가는 그런 대처 능력. 그런 것들이 연기력이라는 걸 형성하는 거라 생각해요. 신이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들이 틀림없어요. 짧은 질문에 어마어마하게 길게 답했죠.(웃음)”
-그동안 기다려온 작품이 ‘사도’ 같은 작품이었다면서요?
“계속 음지에 있었죠. 제 캐릭터들이. 물론 희망도 있고 건강함도 있었지만 일정 부분 음지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들 혹은 감정적들이었죠. 어두운 청춘들의 모습을 많이 오랫동안 표현해왔고 표현하고 싶었고,. 하지만 항상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도’라는 작품은 청춘영화가 아니지만 결국 사도세자라는 청춘 캐릭터는 제가 그려왔던 그림의 연장선에서 정점을 만들어주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어요. 꿈꾸고 그려왔던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나이로 봤을 때도 20대 제일 마지막 끝에서 촬영한 작품이기도 해요.”
-‘사도’도 결국 청춘물로 소화한 건가요?
“네, 그 ‘조태오’도 어마어마한 청춘이었죠. ‘사도’는 청춘물은 아니지만 ‘청춘’을 연기한 거죠.”
-‘밀회’ 이후 아줌마 팬들이 많이 생겼죠? 배우로서도 한단계 성숙한 느낌이 들어요.
“‘밀회’ 때부터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연기력이 성장했다곤 말씀 못 드려요. 어찌 보면 ‘밀회’의 ‘선재’같은 인물은 완득이 캐릭터와 연장선에 있는 캐릭터였죠. 결국에는 어떠한 인물이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느냐가 중요해요. ‘밀회’라는 작품은 제 스타일의 연기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감독님, 작가님, 파트너들 굉장히 좋았던 작품이었어요. ‘베테랑’이나 ‘사도’는 내가 쌓아왔고 내가 발견한 이것을 뿜어내리라 했던 작품들이었던 것 같아요.”
“내 자식이 아니라고 천번 만번 이야기한들 내 자식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부성이라는 게 어떤 패륜을 저지를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씨 같은 거라 생각해요. 저도 아빠를 되게 미워했었어요. 끊임없는 기대와 실망, 그러다 어떤 포기와 미움… 또 나이가 들면서 부성애를 찾고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 보통의 부자 사이처럼 그래도 (부성애가) 남아있지 않을까요. 그 모진 고문을 통해 자식을 죽였어도 그게 퍼포먼스고 쇼였을지언정 무조건 그래도.”
-‘사도세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 데도 애정결핍과 열등감에 시달려요. 그런 감정들 느껴본 적이 있나요?
“왜요, 어마어마하게 느끼면서 살아요. 열등감이 제 힘의 원천 중에 하나에요.(웃음) 열등감, 피해의식, 자격지심. 매순간 느끼고, 어느 순간 느끼고, 모든 타임들에서 느끼죠. 그게 저를 엄청 괴롭히기도 해요. 결국 그것으로부터 유연한 방식으로 솔직해지는. 사실 인터뷰 같은 데서 모난 부분을 잘 드러내는 편이에요. 그래야지만 극복이 된다 생각하거든요. 근데 인터뷰 할 때 위험한 게 있어요. 날 헐뜯고 싶어 하는 대중들에게 빌미를 제공해주는 경우들이 생기죠. 전 굉장히 의식적이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에요.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예술가도 그 어떤 독립적인 인간도 결국 타인과 아주 끈끈하게 얽혀있는 사회성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아쉬운 타인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는 감사히 바라보게 됐죠.”
-‘사도’가 갖지 못한 그 유연함,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나요?
“‘세자’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고 싶다는 거지, 평범한 사람들에겐 절대로 안 하고 싶은 말이에요. 절대로 귀담아 듣지 말아야 할 말이기도 하고요. ‘유도리 있게 하라’는 말은 당연히 좋은 말이지만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 그러니 널 꺾어버려’라곤 하고 싶지 않아요. 나이들면 알아서 다 꺾이는데 뭘.”
-‘베테랑’이 천만을 넘었어요.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제작 과정에선 생각 못했는데 결과물을 보고 ‘가능할 수 있겠구나’ 했어요. 제 연기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악역이 아니잖아요. 그것도 젊은 배우가. 이질감도 있을 것이고요. 충격적인, 더 큰 파장이 틀림 없이 플러스 요인이 됐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사도’는 그런 장치적인 게 없어요. ‘사도세자’ 역을 20대 배우에서 찾는다면 익숙하게 유아인이지 않나 싶어요. 제 칭찬이 아니고 제가 해 왔던 게 있으니까요. 너무 어울려서 문제일 수 있는.(웃음)”
‘사도’도 천만을 예상하는 분위기도 있어요.
“일단은 500만, 500만이 얼마나 큰 수치에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건방진 일이고 교만한 일이에요. 제 첫 영화가 1만명 남짓 들었어요. 물론 독립영화였지만요. 두 번째 영화가 30만명, ‘완득이’가 530만 정도였고요. ‘베테랑’ 같은 경우엔 호불호 없이 ‘호’만 주시니까 지금이랑 분위기가 달랐어요. ‘사도’는 장단점이 명확한 영화라 생각해요. 우직하게 갔고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려고요. ‘우리 스타일대로 멋있게 한 번 풀어보자’ 했던 영화에요.”
-그래도 받고 싶은 시나리오는 어떤 쪽인가요?
“여전히 청춘물이죠. 이 시대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로맨틱 코미디와 로맨스물들 그것 다 청춘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많이 솔직한 얼굴을 연기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유아인의 이런 특별한 감성과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유년기에서 오는 것 같고, 제 성격이나 이런 것들은 끊임없는 생각? 생각하면서 사는 거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며 성장해가는 거죠. 독서량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난독증이 있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유연함인 것 같아요. 친구들이 저보고 엄유연 선생이라고 해요.(하하하)”
-작품을 하지 않을 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친구들과 비즈니스도 하고… 제 또래 동년배의 다른 분야 창작인들이나 예술가들과 더불어 살죠.”
/사진=유용석 기자
• [인터뷰] 최민식 “천만 들었다고 기고만장 할 때 아니다” |
• [인터뷰] 설경구 “정우성도 모자라 다니엘 헤니라니, 젠장” |
• [인터뷰] 정우성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