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해서, 몰라서 혹은 귀찮다고, 알면서도 외면했던 1997년 국가 부도의 시그널, 과연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안심하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영화 ‘국가 부도의 날’(감독 최국희)는 1997년, 사상 초유의 국가 경제 위기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국가적 위기, IMF 사태를 다시금 되뇌어 보게 하는 작품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호황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그때, 곧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정부는 뒤늦게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을 꾸린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기의 시그널을 포착하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 금융맨 윤정학(유아인)은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하고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알리없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 갑수(허준호)는 대형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지만 절망은 현실이 되고야 만다.
반면 한지현과 마찬가지로 위기를 남들보다 빠르게 직감한 ‘금융맨’ 윤정학은 타인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는 인물이다. 경제 위기가 가속회될수록 투자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지만 자신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한 정책과 현실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캐릭터로 IMF시대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윤정학으로 분한 유아인은 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겉돈다. 시종일관 성난 톤으로 열연을 펼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몰입이 되진 않는다. 위기에 대처하는 갖가지 방식 중 하나를 택해 자신 만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가는 인물인데, 작품 속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한 채 별도의 에피소드를 보는 듯 따로 논다. 왜 혼자 그토록 힘을 가득 준 채 ‘베테랑’ 조태오로 빙의하곤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회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던 이 시대의 한 가장으로 분한 허준호나 김혜수와 내내 대립각을 세우는 조우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뱅상 카셀까지 유아인을 제외하곤 누구 하나 구멍 없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감독은 이 같은 다양한 군상을 통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살면서 예기치 못한 무수한 위기를 경험하지만, 매번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반복되는 역사 안에서도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시그널이 있다면 제대로 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은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국가부도의 날’은 우리 역사의 한 최악의 상황을 덤덤하게 담아낸다. 그래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쓸쓸하다. 영화적 기법을 최소화하고 오롯이 메시지에 집중한다. 이로 인해 영화적 재미는 반감되지만 감독의 진정성은 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급작스럽게 교훈 적으로 끝맺음하는 엔딩은 아쉽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메시지의 진정성에도, 다소 산만한 구성과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로 인해 하나로 응집되지 못한다. 오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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