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어제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발언에 대해 발끈했습니다.
김 대표는 추석 전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대표의 3자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제가 댓글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그거야 모르지요. 계량될 수 없는 것 아닌가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초점은 '격앙'이라는 말에 맞춰져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평소 지난 정권으로부터, 또 국정원으로부터도 선거에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말해 왔던 터라 이 말의 취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화를 내면서 이 말을 했다니 왜 그랬을까요?
청와대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격앙 운운하는 것은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한길 대표는 왜 '소설'을 썼고, 청와대는 왜 이를 반박했을까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통속적 분석을 하자면 김한길 대표는 속담으로 치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식으로 박 대통령을 압박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박 대통령이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한 것 자체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일까요?
청와대가 '격앙이라는 말은 소설'이라고 강하게 반박한 것 역시 박 대통령의 말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듯 보입니다.
3자 회담이 끝난 뒤 각각 브리핑을 통해 회담 내용을 밝혔는데, 김 대표가 비공개 내용까지 밝힌 것은 그다지 모양새가 썩 좋아보지는 않습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그토록 반대했으면서도, 대통령과 비공개 회담 내용은 아무렇지도 않게 언론에 공개하는게 과연 잘한 일일까요?
그런데 김 대표의 태도 논란을떠나, 이렇게 청와대와 여야가 말 한마디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각자 처한 상황이 썩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청와대는 국정원 논란과 윤석열 전 팀장의 항명에 대해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국무회의에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박 대통령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여야가 싸우는데 자칫 한마디 했다가는 청와대까지 싸움의 한복판에 끌려 들어갈 판이니 말 조심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그래도 '외압' 얘기가 나오는 터에 섣불리 얘기했다가는 검찰에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개입했다는 의혹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참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검찰 수사팀이 국정원 직원의 개인적인 댓글과 트위터 글을 마치 조직적 개입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는데 그냥 두고 보자니 화가 나지 않을까요?
검찰 수뇌부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맘에 들지 않을 법합니다.
쓸데없이 수사팀을 자극해 판을 더 키워버렸다는 겁니다.
청와대로서는 빨리 검찰 총장을 임명해 조직을 안정시키는 것 외에 달리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일 겁니다.
새누리당 역시 마음이 편한 건 아닐 듯합니다.
새누리당은 겉으로 '불법수사', '윤석열 전 팀장의 항명'이라며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최경환 / 새누리당 원내대표(어제)
-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 항명, 검사의 기본적 직무집행원칙인 검사 동일체 원칙의 명백한 위배, 특수라인과 공안라인의 갑을 싸움이라는 내분을 넘어 수사기밀이 특정 정치세력에게 흘러갔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이렇게 비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대응할 방법은 없습니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트위터 글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직원 일부가 사적으로 썼다 하더라도 야당의 대선 후보를 인신 공격하고 비방하는 내용의 수준 이하 글을 옹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바로 수사기밀 유출과 외압으로 비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가 수사팀만 아는 기밀인 '2233건'이라는 숫자까지 말해버린 터라 더 말조심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신 새누리당은 야권의 대선불복 심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황우여 / 새누리당 대표(오늘)
- "지난 대선 때도 대선결과를 좌우하는 여러 사건 비롯해 근거없는 선동으로 대선 치뤄졌지만, 대선 결과에 불복하지 않고 미래 내딛은 전통이 있다. 불복하려면 떳떳이 법적 절차 밟을것이지 지속적으로 대통령 흔드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속이 편한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선거를 다시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선 불복으로 비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 인터뷰 : 김한길 / 민주당 대표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조롱당하고 있고 국민들이 조롱당하고 있다. 민주당은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 무너져가는 이 상황을 용납치 않겠다."
▶ 인터뷰 : 설훈 / 민주당 의원
- "지난 대선 자체가 심각한 부정이었단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아야 한다. 저는 선거결과가 100만표 차가 됏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정상적 선거였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우리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의 단순한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작금의 흐름이다."
설훈 의원은 '선거 결과를 승복할 수 밖에 없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설마 지난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강경파들은 '선거 부정'을 얘기하면 '대선 불복'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부는 '대선 불복'으로 비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습니다.
강경파 의원들의 튀는 발언 속에서 중심을 잡고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청와대는 청와대 대로, 여야는 여야 대로 복잡한 속내와 셈법 속에서 국정원 사건을 대하고 있습니다.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널 지, 건너지 말아야 할지 강 앞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판단이 과연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차장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