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를 취재하면서 개인적으로 기사 가치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가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면 각국 정상과 전화를 연결하는데 일본과 누가 먼저 연결하느냐를 놓고 마치 스포츠 시합을 중계하듯 작성하는 기사입니다. 일본보다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빠르면 마치 한국 외교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지난해 11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가 성사됐습니다. '다행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보다 빨랐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들의 안도의 한숨 소리가 기자실까지 들리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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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7일 미국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워싱턴=연합뉴스 |
12.3 비상계엄 이후 정상외교의 부재에 대한 우려가 극에 달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현지시간으로 2월 7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워싱턴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직후였습니다. '일본은 미국과 정상회담까지 했는데, 한국의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화통화도 하지 못했다'는 식의 날 선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이시바 총리가 회담에서 1조 달러 수준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지만, 이후 추가 관세 조치 적용의 예외를 받지 못하는 등 큰 '약발'이 없는 모습에 위기감도 서서히 줄었습니다.
트럼프가 각국 정상들과 소통하며 '도장 깨기'에 나서자 외교가 일각에서는 정상의 부재로 아직 청구서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옵니다. 취재 내용을 종합해보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와 트럼프의 전화연결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한덕수 총리가 복귀해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트럼프발 청구서를 마냥 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외교 관계자는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오고 리더십이 정리되면 트럼프는 바로 다음날 전화를 걸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청구서를 보낼 수신인이 생겼기 때문이죠.
청구서를 앞둔 상황에서 트럼프와 밀월 관계를 유지했던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이 주둔하며 방위비를 부담합니다. 트럼프는 1기 때도 일본과 한국의 방위비 액수가 너무 적다며 대폭 인상을 압박했습니다. 후나바시 요이치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 아베와 인터뷰를 한 뒤 내용을 정리해 최근 발간한 <숙명의 자식>을 보면 일본은 아베의 개인기로 트럼프의 예공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아베는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일본은 미군 주둔 비용의 70%를 부담한다. 집세·수도·전기요금·식비까지 모두 일본이 지불한다. 만약 미군을 캘리포니아로 옮기면 미국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올라갈 거다." 아베의 말을 들은 트럼프는 크게 웃으며 이후로는 방위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숙명의 아들 中>
전세계가 트럼프발 소나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우리는 정상의 부재로 겨우 피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다행이라고 안도할 일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 한국에 청구서가 도착했을 때는 이자가 잔뜩 쌓여 소나기가 태풍이 돼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예상보다 길어지며 선고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지만, 이는 조만간 해결될 겁니
[이성식 기자 mods@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