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업이 막 태동하던 시절, 공과대학은 현재의 '이공계 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최고의 인재가 몰리던 곳이었습니다.
변변한 실험·실습 장비 하나 없던 열악한 환경에도 공대생들은 오직 '공업입국' 실현에 매달렸습니다.
최근 문을 연 서울대 공대 역사관에서 갈태웅 기자가 당시 공대의 발자취를 들여다봤습니다.
【 기자 】
야금학과, 채광학과.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공학계열 전공입니다.
이들을 포함한 9개 학과로 1946년 서울 공대는 출발했습니다.
옛 경성대학 이공학부 공학계,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가 통합됐던 만큼 이들 시설을 써야 했습니다.
6·25 당시, 부산 서대신동의 서울 공대.
전시연합대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공학 교육을 꾀했지만, 모든 게 초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1950년대 당시, 책상 몇 개가 전부였던 건축공학과 실습실 도면 설계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항공공학과에선 해외의 멋진 선박들을 그저 사진으로 감상하면서도, 조선 강국의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는 누런색 강의시간표와 수강 카드, 하지만, 당시 공대엔 최고의 인재가 몰렸습니다.
▶ 스탠딩 : 갈태웅 / 기자
- "한국의 산업의 걸음마를 떼던 시절, 별도의 배지와 버클이 나왔을 정도로 공대의 자부심은 컸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이공계 위기 속에 공대의 위상과 비중도 예년 같지가 않습니다.
▶ 인터뷰 : 강태진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
- "일본 도쿄대의 예를 보면, (아직도) 공과대학의 비중이 도쿄대 전체 비중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대한민국, 그 속엔 정말 시작이 미약했지만, 어느덧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선 우리의 공학기술이 숨어 있습니다.
MBN뉴스 갈태웅입니다. [ tukal@mk.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