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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N 시사데이트] '한중수교 주역' 박철언 전 장관이 밝히는 '한중수교' 비사

기사입력 2013-06-25 20:48 l 최종수정 2013-06-2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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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정상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식 일정도 비워둔 채 회담 준비에 매진했다고 하는데요. 비법을 알면 더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흔 두 차례나 남북 비밀회담 수석대표를 지내셨고 한중 수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을 직접 모셨습니다. 박철언 전 정무 장관 모시고 그 비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이하 인터뷰 전문]

▶ 최근의 시끄러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NLL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결국 공개가 되었는데 북한을 잘 아시니까요. 이것이 혹시나 북한을 자극하는 거 아니냐, 남북관계가 나쁜 영향을 받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거든요.

-어제 저녁하고 오늘 오전 방송·신문을 통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보고 사실 상당한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인간적으로 상당히 서민적이고 감성적이고 재직 중에 좋은 일도 많이 했죠. 권위주의를 청산하려고 했다든지 한미 FTA를 타결했다든지 깨끗한 정치 풍토를 위해서 선거법도 획기적으로 바꿨다든지 이런 것을 했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면 많은 국민들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대통령에게는 영토 보존의 책무와 국가안보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이 그것을 소홀히 하고 마치 짓밟는 듯한 국기 문란 행위에 대해선 마땅히 공개되어야 하고 여야 할 것 없이 정당하게 평가를 받아야 된다고 봅니다.

▶ 발췌본이 아니라 전문이 전부 공개되는 것이 옳다고 보시나요?

-당연하죠. 물론 정상 간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국익이나 기본 질서, 국민을 대표하는 차원에서의 말과 행동을 했을 때를 대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작년도부터 나온 얘기로 상당히 우려스러운 내용들이 많이 나왔고 여야 간에 쟁점이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 끌고 갈 겁니까. 내가 볼 땐 이것이 공개되어서 북한에선 겉으론 유감을 표시할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론 그 내용이 김정일 위원장은 굉장히 당당했고 우리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는 호소하고 매달리고. 예를 들어서 ‘NLL은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김 위원장님과 인식을 같이 한다’ ‘이번 정상회담 때 북한에 핵 얘기하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판 깨기 바라는 사람들의 얘기다’ ‘자주적 나라는 북척 공화국밖에 없고 우리는 친미 국가다’ ‘나는 임기가 5개월 남았지만 임기 끝난 다음에도 수시로 보자고 해주십시오. 임기 마친 다음 위원장님을 꼭 뵙진 못하더라도 평양을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게끔 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한 대접 안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김 위원장이 ‘침구 기다려놓고 준비 하겠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는 사실이 아닌 것을 국정원에서 조작해서 했다곤 보진 않습니다. 그 점도 국정조사를 통해서 밝혀야 되겠죠.

▶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고요.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내용상으로 봤을 때 북한에선 불리한 게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북한에선 이것을 공개했을 때 어떻게 나오게 될까요?

-어떻게 나온 다기 보다는 북한은 지금까지 자기들 주장을 하고 있잖아요. 자기들은 핵 폐기할 수 없다. 한반도 비핵화 되고 자기들 안전이 담보될 때 까지 할 수 없다. 사실 더 거슬려 올라가면 지난 2O년 역대정부의 북핵 문제 대응이나 대북 정책을 잘못 한데서 이런 결과가 났습니다. 5공의 전두환 대통령, 6공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제가 비밀 회담 대표로 여러 차례 회담을 했습니다만 분단 극복사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당하고 역사 앞에 떳떳해야 합니다. 1985년 12월 2일 북한이 NPT 서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잘 되어서 1991년 11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 남북기본합의서도 채택하고 1992년 2월에는 비핵화 공동선언도 해서 잘 됐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 들어 갈팡질팡 5년을 하니까 북한이 1993년 3월에 NPT 탈퇴를 통보했습니다. 그 후 20년 생활동안 갈팡질팡 5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물론 정상회담을 통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많이 낸 공적도 있습니다만 일방적 퍼주기로 인해서 잘못했죠. 또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비핵개방 3000구상이라는 어정쩡한 대북강경책을 가지고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이 2,3 년 내에 핵무기에 장거리 미사일 까지 달아서 실질적인 핵 무장 국가로 등장하리라 전문가들이 보고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이 됐으니까 박근혜정부 들어서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구성이라는..

▶ 지금 북한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아마 중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틀 뒤면 중국을 국빈방문해서 시진핑 주석을 만나게 되는데 장관께서 보시기에 중국이 북한보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세요?

-북한이 최근 은하 3호라고 해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도 하고 3차 핵실험도 해서 말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비판과 감정이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중국과 북한이 관계라고 하는 것은.. 2009년 8월에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고 난 다음에 중국공산당 중앙외사 공작영도소조라는 회의를 했습니다. 우리 한반도 정치의 기조를 정하는 건데요. 그것은 국가주석하고 외교안보관계 최고 10명이 모여 하는 건데 거기서 결론을 내길 북한은 여전히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다.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는 분리해서 대응한다. 북한 정권의 안전성을 더 우선에 둔다는 얘기겠죠. 때문에 지난 3월에 시진핑 시대가 등장했지만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박근혜정부가 강력한 대중외교 강화가 절실하고 조금 노력한 기미도 보이데요. 특사도 당선자 시절에 제일 먼저 보냈는데 그러나 역시 오바마하고 정상회담을 먼저 했잖아요. 제가 참모 같으면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은 이미 되어 있으니까 동북아 아시아에 있어선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시진핑 하고 정상회담을 먼저 했으면 하고 제가 취임 초기에 TV에 나와서 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렇게 못 되었죠.

▶ 정상회담도 미국보다 중국과 먼저 하는 것이 더 유리했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유리보다 우리의 당면 목표는 북 핵을 폐기하고 남북이 평화공존해서 장차 평화통일의 길을 닦아나가는 거 아닙니까. 평화공존하기 위해서 북 핵이 폐기되어야 해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선 우리가 하루라도 발 뻗고 잘 수 없습니까. 북한은 2005년 2월 10일에 이미 핵보유 선언을 했고 1,2,3차 핵실험을 성공을 했고 지금 플루토늄 핵탄을 8~10개 가지고 있다고 서방에서 보고 있고 우라늄 핵탄을 제조하기 위해서 총력을 집중하고 있죠. 그런 마당에 일 년에 몇 차례 미국 핵잠수함이 훈련하고 돌아간다고 해서 1년이 365일인데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북한 핵을 포기시킬 수 있겠는가. 북한이 유료의 90%, 식량 부족분의 20%, 무역의 70%이상을 중국에 의존하니까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 북한이 안 들을 수 없죠. 그러나 북한한테 그냥 압박을 가한다고 해서 북한이 포기하지 않습니다. 북한한테 새롭게 살 길을 제시해주어야죠. 그 살길이란 결국 자기 체제를 인정받고 체제 인정이라는 것은 북미 간 수교하고 북일 간 수교하고, 서방에서 대폭적인 지원해주고 김정은 체제에 대해서 인정한다 해주고, 이런 구체적인 것을 내놓아야지 핵을 포기할 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고 그렇다면 중국이 어떻게 해야 그런 액션을 취하겠는가. 그것은 미국의 대중국 봉쇄전략을 오바마가 재조정해야 합니다. 중국은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싶은데 미국에서는 지원체제, 미국 유일 패권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중국을 봉쇄하고 있죠. 일본, 한국, 대만, 호주, 베트남, 인도 C자형으로 보위하고 있죠. 그렇게 연대해서 중국 진출을 봉쇄하려고 하고. 그 한에서 중국은 북한이 지정학적 전략적 자산이 될 수밖에 없죠.

▶ 앞으로 북한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선 한중간의 관계 설정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은데 지금 한중 수교가 20주년이 넘어 21년 정도 되었잖아요. 그동안 한중관계는 외교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가까워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수교 전 처음 단초가 된 것은 1985년 중국해군 어뢰정이 우리 남쪽 소흑산도 부근에 표류하는 것을 우리 어부들이 예인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해군 함정 3명이 월경을 해서 우리 영해에 들어오자 우리 공군과 해군이 출동해서 격퇴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정식으로 요구했죠. 그때 안기부장 특보로 있었는데 마침 그것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 실무총괄을 제가 맡아서 할 때였죠. 선원이 19명이었는데 2명이 선상 무장 난동을 해서 6명이 죽고 2명은 타이완으로 망명시켜달라고. 중국에 돌아가면 자기네들이 죽으니까. 인도적 견지에서는 사실 우리가 보내는 것이 맞죠. 가면 처형되니까. 우리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안된 얘기지만 우리가 중국하고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국익을 위해서 신속하게 공해상에서 두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호위 경관 네 명이 저쪽에 넘겼죠. 살아있는 생존자, 시체 할 것 없이 다 넘겨줬어요. 그 후에 중국에서 월경한 것을 사과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소평도 감사를 표하게 됐죠. 그래서 조금씩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겁니다.

▶ 그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조금 달리 보게 시작하게 되는 거군요?

-큰 계기보다 단초가 되었죠. 그 후 1987년 8월에 제가 아시아 태평양 법률가 회의 고문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해서 부총리를 면담하게 됩니다. 그 후에 6공화국이 들어서서 대통령 밀명으로 수교를 위한 교섭을 위해 여러 차례 중국에 가게 되죠.

▶ 수교를 위한 교섭을 하실 때 중국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았을 거고 어떻게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시킬 수 있으셨나요?

-당초 우리 북방 외교의 시작은 사실 5공 말기 안기부 특보 시절에 공산권 팀을 구성해서 제가 실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되신 다음에 대통령 프로젝트로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정책 보좌관으로서 안기부의 핵심 팀을 보강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죠. 당초의 목표는 소련보다 중국하고 먼저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접촉을 많이 했습니다. 1987년 8월에 제가 처음 보고한, 5년 여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주로 중국의 장차관급까지는 많이 만나서 수교의 당위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언론사 신화사 간부들, 북경 대학에 가서 제가 특강도 하고, 경제계, 무역관계에 사람들. 많은 것을 해 가는데 있어서 한중 수교를 하는 것이 중국에도 좋고 북한에도 좋고 우리에도 좋지 않겠는가. 지금 안하고 있음으로 오히려 일본만 반사적 이익을 보게 된다는 논리를 많이 폈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그런 사람들이 전부 설득이 되고 공감을 하니까 저한테 하는 얘기가..1991년 7월로 기억됩니다만 체육청소년부장관 시절인데 오소조 체육부 장관 하고 체육 회담을 하고 그 전에 가서 핫라인을 구축한 게 정치국 상무위원, 북경시장, 북경 부시장을 핫라인으로 한국에서 서신과 전화로 서로 연락을 많이 했었는데 그 사람들 얘기가 이제 우리들은 충분히 알겠는데 혁명 1세대들이 문제다.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하고 전부 혈맹관계, 피를 나눈 관계여서 북한하고 직접 만나게 할 순 없으니까 자기들한테 한 얘기를 그대로 장문의 편지로 써주면 전달하겠다. 그러면서 8명을 지정해주었습니다. 8명이 누군가 하면 당시 중국 최고 지도부 다섯 명입니다. 등소평 선생, 양상쿤 주석, 만리, 강택민 주석. 이붕 총리. 이렇게 최고 지도부 다섯 명 하고 그 당시 실무 담당 지도부 세 사람.. 제가 국어로 써서 중국어로 비밀리에 번역을 해야 하니까 언약을 해서 안기부 국전에 특선한 팀에 보안이 되는 필경 요원이 있어서 쓰게 하고 뒤에 우리 국어 판을 붙여서 26페이지를, 예를 들어 등소평 선생한테. 양상쿤 주석한테도..

▶ 내용은 똑같은 거죠?

-조금 다르죠. 물론 주류는 마찬가지지만 약간 변경은 있었어요. 강택민 총 서기한테, 만리 상무위원장에게, 이붕 총리한테 이렇게 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양이 많아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공개하는 것도 MBN에서 처음입니다. 부분적으론 얘기했지만. 1991년 7월 25일 수교 1년 전입니다. 그렇게 보냈더니 우리 핫라인한테 연락이 오길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니 시간을 달라. 시간이 있으면 잘 될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그 후 91년 9월에 유엔총회에서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짤막하게 있고 91년 11월 13일에 전기침 장관이 한국에 왔을 때 제가 신라호텔 1431호실에서 두 시간동안 단독회동을 하면서 사실상 성숙단계에 이르죠.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2년 8월 24일 중국에서 먼저 하자고 연락이 왔잖아요. 어떤 경위로 이렇게 빨리 이러느냐. 조금 당혹했을 겁니다만 사실 5년간 줄기차게 막후교섭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도와준 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합섬에 장치혁 회장님 같은 분들이 중국하고 거래를 많이 했으니까요. 우호협회 최고 간부들 소개시켜 주고 많은 중국 요인들을 불러서 파티도 여러 번 했습니다. 파티 하는데 돈이 많이 드는데 제가 사비를 댈 수도 없고 그런 분들이 많이 썼습니다.

▶ 국가 간의 만남도 진심으로 마음이 통해야 외교가 수립되는 거네요?

-물론이죠. 자기에게만 덕이 되도록 타결할 순 없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도 좋고 중국도 좋고 북한에도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노태우 대통령 초기인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라고 해서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의 기조를 발표한 게 있습니다. 제가 정책보좌관 시절에 팀장이 돼서 안기부, 외무부, 통일부, 관계부처 책임자들과 만들어서 대통령 결제를 얻은 건데요.
북한하고 과다한 경쟁을 벌이지 않고 서로 공존해서 국제무대에서도 경쟁하지 않고 우리가 중국,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겠다. 북한도 일본, 중국하고 외교관계 맺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우리가 지원한다. 이것이 선언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6공화국 노태우 정부 5년 동안, 옛날에는 미·일 등 자본주의 나라 백 여 개만 외교관계가 있었죠. 반쪽 외교였죠.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을 통해서 대통령 프로젝트로 39개국 하고 수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7.7 선언을 다 이뤘는데 북한은 최고 수뇌부의 경직성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이 정권이 바뀌었죠. YS 정권 시절에 북방 정책의 기본 철학을 모르는 채 20년간 오니까 북한은 자기들의 살길은 이제 핵 개발뿐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외교적으로는 절대 열세에 있으니까. 후속 정권에서 빨리 미국, 일본, 서방하고 북한이 외교관계를 맺게 해주고 북한도 살 길을 열어줘야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안 하고 있고 못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북한이 자멸하지 않느냐. 그거야 스스로 자멸하면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그런 것을 바라고 있어선 안 되죠. 우리가 핵을 폐기시킬 때는 북한이 핵을 폐기시킬 수 있도록 살길, 새로운 화로를 열어주면서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 의아스러운 게 한중 수교 과정에서 안기부가 집요하게 간섭을 했다고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일인데요. 제가 체육청소년부 장관 시절인 91년도 7월에 방문해서 수교담당 부총리를 만나서 테니스 치고 수영하고 만찬 하는 것을 우리 핫라인에서 다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취소됐다고 핫라인 측에서 얘기합디다. 나중에 핫라인한테 연락오길 사실은 안기부, 요즘 국정원이죠. 국정원 간부가 북경에 오고 북경 안기부 파견관이 찾아와서 박철언 장관은 체육 회담이나 하지 수교문제에 대해서 협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권한을 받아서 5년간이나 쭉 해오고 있는데 저에게 통보도 없이 안기부 파견관이 와서 얘기를 하는 통에 사실로 믿고 취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대단히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됐다고 사과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저는 아직도 노태우 대통령이나 서동권 안기부장한테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냐. 물어봤자 다 끝난 일이니까. 내 짐작으로는 그 당시 91년도 저의 정치적 입장이 뭐냐면 내각책임제를 하기로 하고 3당 합당을 하기로 했는데 그런 약속한 일 없다고 거짓말 했다가 각서가 나오니까 공작정치라고 땡강을 부려서 나와 YS측하고 아주 나빴습니다. 국민과 역사와의 약속인 내각제를 지키지 않는 분을 대통령으로 밀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밀어라, 나는 못 민다. 이렇게 있는 통에 당시 서동권 안기부장은 YS하고 굉장히 밀착되어서 YS를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는 상황이니까 내가 여러 가지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건 내 짐작입니다.

▶ 내부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그래서 중요한 북방외교, 중국과의 수교가 그만큼 중국보기도 창피했죠. 사실 얼마 전에 보니 격을 가지고 이번 남북 당국 회담이.. 사실은 격을 너무 따질 것이 아닙니다. 회담을 해야죠. 해서 우리가 할 말을 해야지. 아쉬움이 많죠. 어떤 일이 있었냐면 1985년 7월에 제가 전두환 대통령 정권을 위임받아서 정상회담을 위한 차관급 실무 회담 대표로 가게 되는데 제가 당시에 차관급이어야 되는데 거기 격을 맞추어 가야 하는데 저는 당시 고등검찰청 검사로서 안기부에 특보로 파견 가 있었고 제 계급을 올려주지 않았으니까 외교안보 연구위원 차관급, 이런 가칭으로 해서 갔는데 북한에서 누가 나왔냐면 외교부의 부부장도 하고 유엔 내 수석대표도 했던 고참 차관급 한시해 대표가 나왔어요. 북한이 훨씬 격이 높았죠. 우리가 차관급 해놓기로 해놓고 격을 안 맞춰 준 거죠. 그래서 마음속으로 민족문제는 투명하고 당당해야 하는데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후 일 년 뒤에 전두환 대통령께서 내 직급을 차관급으로 상향 조정해준 일화도 있습니다. 분단극복사에 있어서 당국 책임을 지고 지금 김정은 비서의 책임을 위임받아 나오는 것이고 우리도 누구든지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아 하면 됐지 너무 격을 맞추면 체제가 맞지 않은데.

▶ 얘기를 들어보니까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 정권을 위임받아서 한중 수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으신 것 같아요. 요즘에도 연락을 하시나요?

-노태우 대통령께서 대통령 되는 과정에도 그렇고 제가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하긴 좀 어렵죠. 왜냐하면 처 고종 사촌이니까. 김옥숙 전 영부인께서 저하고 외사촌 관계인데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부터 외가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내외분하고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6공화국을 열고 6공 시대에 노태우 대통령을 보좌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께서 YS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감옥도 가고 비자금 사건으로 2년여 고생하고.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 전립선 암 수술을 하시고 그 후유증으로 5~6년 전부터 소뇌수축증이라는 희귀한 병이 와서 언어장애와 행동장애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김옥숙 영부인께서 간호하느라 지극정성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 최근 전 대통령의 추징금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김옥숙 여사가 검찰에 탄원서를 냈어요. 어떤 배경이라고 봐야 될까요?

-그것도 이런저런 얘기가 많고 동생 되는 노재우 회장님과 연관되는 분들이나 사돈되는 분들 쪽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합디다만 제가 보건대 노태우 대통령께서 지금처럼 언어, 행동 장애가 있기 전인 5~6년 6~7년 전부터 그런 소망이 있었습니다. 내가 나라의 큰 빚을 졌으니 추징금을 다 해결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미 해결된 게 200억 원 여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받을 수 있는 돈을 받아서 추징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국가 사회에 환원시키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한 시대를 책임졌던 전직대통령으로서 도리가 아니냐. 그런 뜻에 의해서 한 것이고 그게 지리 하게 몇 년 끌어오다가 아직 해결이 안 되니까 김옥숙 전 영부인께서 탄원서를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충정을 주변에서도 아니까 협력을 해서 잘 해결되리라 기대합니다.

▶ 일부에서는 아들과 딸에게도 어느 정도 비자금이 흘러들어간 의혹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유독 동생과 사돈에게만 추징해달라고 얘기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 않나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글쎄요, 아들과 딸한테 흘러갔는지 안 갔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동생과 주변 사돈 분

들은 사실 노태우 대통령의 은덕을 많이 보신 분들 아닙니까. 돈을 맡겨서 반환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은 재판에서 이미 드러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드러났으니까 그런 분들이 협력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알겠습니다. 오늘 긴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지은 인턴기자(mbnreporter01@mbn.co.kr), 사진=해당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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