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가져가.”
중견기업의 새내기 직장인 강호연(가명, 29, 남)씨는 회사가 주관한 연말 봉사활동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새벽부터 임직원 전원이 모여 담근 김치를 독거 노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노인들이 한사코 받기를 거절한 것. 강 씨는 섭섭한 생각이 들어 선배에게 하소연했다가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선배가 말하길 작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는 겁니다. 재작년도 마찬가지고요.”
강 씨에 따르면 이유는 김치 맛 때문이다. 강 씨의 회사는 매년 겨울이면 김치 담그기 봉사활동을 펼치고 관련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한다. 많은 양을 기부할수록 기업 규모도 커보이고 기업 이미지에도 도움이 되다보니 몇 년 전부터 배추 포깃수에만 집중하게 돼 배추를 많이 사는 대신 젓갈 등 양념은 제대로 쓰지 않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 해당 기업의 연말 김치 담그기 포깃수는 지난 2012년부터 2배 가까이 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부 김치에는 젓갈 하나 없이 고춧가루만 들어가는가 하면 소금이 부족해 제대로 절여지지 않은 배추도 있다. 이런 김치를 매년 같은 집에 배달하다보니 "김치를 안 받겠다”며 퇴짜맞는 일이 잦아졌다. 일부 독거 노인들은 항의의 표시로 김치를 대문 밖에 놓아두기도 한다.
강 씨는 "과장 이상의 임직원이 김치를 담그고 신입사원과 대리가 주로 배달을 맡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이유가 뭐겠느냐. 봉사활동이 해를 거듭할수록 김치를 안 받거나 문전박대하는 상황도 잦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맛이라는 게 주관적일 수 있지만 선배와 얘기를 나누면서 기업의 사회 봉사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며 "전부 다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여주기'에 집착하는 이 곳에 들어오기 위해 내가 그토록 토익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싶다”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장하재(가명, 33, 남)씨도 말을 더했다.
그는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는 임원 부모가 귀농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늘 그 곳에서 배추를 구입해 단체로 김장을 담갔다”며 "대부분 임직원 친인척의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를 대량으로 사들이거나 소금을 구매하는 등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다”고 전했다.
장씨에 따르면 가격이 가장 저렴한 것도 아니고 품질이 우수한 것도 아닌 곳에서 김장 물품을 들여온다고 하면 대부분 직원들은 '아 이번에 상무님 댁에서는 이 농사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채송연(가명, 32, 여)씨 역시 기업의 봉사활동 문제점에 맞장구를 쳤다.
채 씨는 "연말이면 일부 기업은 '너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급히 봉사활동을 진행해 허점을 다수 드러낸다”며 "우리 회사의 경우 생필품을 기증하는데 전달 방법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가 막판 기름값을 아낀다며 직원들에게 개별로 배송량을 할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차 있는 직원은 퇴근 후 각자의 차로 생필품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지날달에 이어 이번달 기름값이 배로 들었다”며 "기름값이 아깝다는 게 아니라 이같은 기업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속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채 씨에 따르면 구역을 나눠 직원들에게 할당량을 나눠준 뒤 회사는 배송을 제대로 마쳤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채 씨는 "식품이 아닌 휴지 등 생필품이기 때문에 차 안에 방치해두기도 쉽고 자기가 갖고 갈수도 있는 것 아니냐”면서 "동료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꼼꼼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과 관련해서도 입을 모았다.
장 씨는 "지난달에 이어 이번달 월급의 일정 부분을 회사가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란 명목으로 일정 부분 차압해 갔다”며 "부장이 나서서 '얼마씩 모아서 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가 어딨냐'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해당 기업은 연말마다 'ㅇㅇㅇ 대표 외 임직원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불우이웃 돕기 성급을 특정 방송사에 의탁한다.
장 씨는 "개인적으로 봉사활동도 하고, 기부도 매달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늘 대표가 자기 이름을 앞세워 기부하지만 정작 그는 매년 직원들과 같은 금액을 내고 있다”며 "솔선수범을 하든지 기업명으로만 내야 한다”고 꼬집었다.
[매경닷컴 배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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