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1년 넘게 취직 준비를 한 A씨는 며칠 전 서울의 한 IT업체에서 채용 합격 통보를 받았다. 워낙 취업난이 심해 지난 여름부터 줄줄이 고배를 마신 A씨에겐 가뭄의 단비같은 희소식이었다. 중소기업이라도 자신이 희망하던 직무인 개발자로 입사할 수 있어 더욱 기뻤다. 그러나 회사가 제시한 황당한 '입사 준비물'이 A씨를 갈등에 빠뜨렸다. 업무에 쓸 노트북을 직접 구입해 와야 한다는 것. A씨는 개발자 업무에 필수인 컴퓨터조차 신입사원에게 사오라고 하는 업체에 과연 미래가 있을지 의문이다.
취업 전쟁 속 '미생'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일부 중소기업의 '갑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업종을 불문한 여러 회사들이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신입사원들을 착취하고 있지만, 취업난에 시달리는 '을'의 입장에선 적절한 맞대응이 어려워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신입 개발자에게 노트북을 사오라고 하는 경우는 양반이다. 노트북 값을 개발자에게 먼저 내라고 시킨 뒤 2년에 걸쳐 할부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신입사원들의 발을 묶어놓는 경우도 있다.
한 대기업에서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 관리를 맡고 있는 박 모씨(30)는 "보안이 최우선인 IT 업체에서 자기 노트북을 직접 사오라는 건 최소한의 기본 요건도 갖추지 못한 열악한 업체라는 뜻”이라며 "취업 전쟁이 벌어지는 요즘같은 시절엔 울며 겨자먹기로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이 업계에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회사 주식을 강매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한 노동상담기관에 따르면 최근 부산의 한 기업은 입사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B씨 등에게 연봉의 30%만큼 자사주를 매입하라고 강요했다.
B씨 뿐만 아니라 연차가 있는 직원들에게도 함께 압력을 넣어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현금이 없으면 약 4% 이자 대출을 알선해주겠다며 브로커를 자처하기도 했다. 상장할 가능성도 없는 주식은 사지 않겠다는 B씨에게 회사는 퇴사 압력까지 넣고 있다. 안병룡 우리사주제도 연구소 소장(50)은 "B씨와 같이 회사가 주식을 직접 강매하는 사례라면 증거를 수집한 후 고용노동부에 바로 신고하면 되지만, 우회적인 방법으로 매수 분위기를 만들 경우에는 버티기 밖에 방법이 없어 구제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면접 때는 달콤한 조건을 제시해 현혹해놓고 막상 입사계약서를 쓸 때 열악한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도 미생들의 꿈을 좌절시킨다.
지난해 여름 면접에서 '정규직, 연봉 2300만원, 인센티브·성과급 유(有)'라는 조건으로 입사를 결심한 김 모씨(27·여). 그러나 근로계약서 작성 당일이 되자 근로 조건은 '6개월 수습 과정 후 정규직, 연봉 2000만원, 인센티브·성과급 무(無)'로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이미 다른 회사로 갈 수도 없게 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했지만 날이 갈수록 회사에 대한 불만만 쌓인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명시된 근로조건이 실제와 다를 때는 손해배상 청구나 계약해제가 가능하지만, 김씨의 경우 엄밀하게는 회사가 내건 새로운 계약조건을 수용한 셈이라 구제가 어렵다”며 "근로계약 시부터 스스로 계약조건을 잘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헤어디자이너 C씨(20대 중반·여)는 '해외 연수'를 보내준다는 말에 지난해 11월 한 백화점 해외 브랜드 미용실에 들어왔다. 하지만 근무를 시작하자 미용실에선 해외 연수는 일부만 선택해서 보낸다고 말을 바꿨다. 항의하는 C씨에게 고용주는 "매출이 좋아야 보내줄 수 있는데 당신은 매출이 좋지 않다”며 근무한 지 3개월째인 C씨에게 근로계약서도 작성해주지 않은 채 퇴사를 강요하
청년유니온 백우연 노동사무국장(27·여)은 "신입사원들은 힘이 없는 게 당연하다. 많은 청년들이 기업 갑질에 항의하면 본인이나 동료가 피해를 입을까봐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서 부당한 근로 형태에 대해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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