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출판사는 2009년 12월 환경 관련 대학 교재용 서적을 출판한 후 올해 3월과 9월 추가로 2권의 책을 더 발행했다. 겉 표지가 바뀌고, 저자가 16명에서 20명으로 변경됐을 뿐 책 내용은 2009년 12월 버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B출판사가 출간한 제어공학 서적도 마찬가지다. 표지에 기재된 책 제목이 방지기술로 바뀌면서 저자가 1명에서 무려 8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만 달랐다. 원저자는 출판사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교수 7명의 이름을 저자로 올리는데 동의했지만 책 내용은 그대로였다.
고도의 윤리성을 갖춰야 하는 대학 교수들이 다른 교수가 쓴 책의 겉 표지만 바꿔 자기가 쓴 책인 것 처럼 출간해 오다 무더기로 적발됐다.
교육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표지갈이’ 수법이 수십년 동안 가능했던 이면에는 출판사와 허위 저자, 원 저자의 공생관계가 있었다.
대학 전공 서적 ‘표지갈이’ 사건을 수사해 온 의정부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권순정)는 원 저자 23명 등 대학교수 182명을 적발해 179명을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약식기소 105명 포함)하고, 해외연수중인 교수 3명을 기소중지했다고 14일 밝혔다. 검찰은 또 표지갈이 서적을 낸 4개 출판사 대표 등 임직원 5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허위 저자로 확인된 교수들은 2010~2015년에 원 저자가 쓴 책의 겉표지만 바꿔 저자로 등재하거나 단독 저자로 등재해 저작권법 등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전국 110개 대학에 근무하고 있으며 대부분 4년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전국 192개에 이르는 4년제 대학 가운데 50%가 넘는 대학의 교수들이 ‘표지갈이’ 범죄에 연루된 셈이다. 여기에는 서울 유명 사립대, 지방 명문 국립대 교수는 물론, 학과장 9명도 포함돼 있다. 6명의 교수가 적발된 대학이 3곳, 학과 교수의 3분의 1 이상이 적발된 사례도 2건이나 됐다.
‘표지갈이’는 건축 토목 환경 등 이공계열 서적 38권에 집중됐으며, S사 등 중규모 출판사 4곳(사장은 2명)이 범죄 통로가 됐다. 검찰 관계자는 “출판사가 원저자에게, 허위저자가 출판사에 요청해 표지갈이가 이뤄졌으며 원 저자의 경우 출판사의 표지갈이 요청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먼저 요청하지는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원저자와 허위저자는 대부분 모르는 사이여서 출판사가 중간에 다리를 놓은 경우가 많았다.
검찰은 “공소시효(저작권 5년·업무방해 7년)를 고려해 수사범위를 2010년 이후 벌어진 ‘표지갈이’로 한정했지만 수십년 동안 진행돼 교육계의 관행처럼 굳어져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이공계 서적 분야에서 ‘표지갈이’가 오랫동안 성행한 것은 인문·사회과학 서적과 달리 일반 독자에게 판매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대학 구내 서점 위주로 판매하다 보니 출판사는 재고 처리가 필요하게 됐고, 허위저자는 표지갈이 서적을 연구실적으로 제출할 수 있어 출판사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원저자는 출판사의 표지갈이 요구를 묵인할 경우 다른 교재 출판 기회를 확보하고 인세를 추가로 받을 수 있어 부당한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다. 실제로 허위 저자 56명은 호봉 승급, 재임용 심사 등에 표지갈이 서적을 연구실적으로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위저자 4명은 표지갈이 서적을 연구실적으로 제출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자 철회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일부 교수들은 출판사에서 무단으로 본인 이름을 등재했다고 진술하거나, 연구실적 제출을 부인했으나 소속 대학에 확인 결과 제출 사실이 드러났다”고 전했다.
검찰은 표지갈이에 연루된 교수 명단을 소속 대학에 통보하고, 추가 수사를 위해 ‘연구부정행위 전담 수사팀’을 의정부지검에 편성·운영하기로 했다.
검찰은 저자만 바뀐 서적들이 강의 교재로 채택되고 연구실적으로 제출돼도 표절여부, 실제 저작 여부에 대해서는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강의교재 또는 연구실적 제출자
출판전문가인 표정훈 한양대 특임교수는 “표지갈이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학계의 자정 능력이 필요하나 당장 그게 어렵다면 교수 평가 등에 불이익을 주는 제재수단이 제도적으로 마련돼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홍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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