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19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쓴소리를 쏟아낸 것은 노동계의 근거없는 의혹 제기에 노동개혁 법안이 발목을 잡혀있는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한 심경 때문으로 해석된다.
근로기준법, 산재보험법, 고용보험법, 기간제법, 파견법 등 노동개혁 5대 법안은 지난해 11월 1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됐다. 정부·여당은 정기국회 내 법안 처리를 추진해왔지만 기간제법과 파견법을 둘러싼 노동계와 야당의 반발에 가로막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정기국회 회기가 끝난 이후 작년 12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개혁 법안을 논의했지만 소득없이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있었던 신년 기자회견에서 논란이 됐던 기간제법안을 중장기 논의과제로 돌려 사실상 철회의사를 밝혔지만, 1월 임시국회에서도 야당과 노동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4월 총선 전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2월 임시국회 본회의는 오는 23일 열린다. 여전히 처리 여부는 불투명하다. 노동계와 야당은 용접·주조 등 ‘뿌리산업’에 대한 파견업종 확대, 고령자와 고소득자에 대한 파견허용 등을 담은 파견법이 통과되면 파견근로자를 양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이 장관은 이같은 상황을 쇼펜하우어가 언급했던 ‘마야(Maya)의 베일’에 비유했다. ‘마(Ma)’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니다’라는 의미이며, ‘야(Ya)’는 ‘사실’이라는 뜻이다. 마야의 베일은 ‘실체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실체라고 믿는 허상’을 의미한다. 이 장관은 “중장년층은 파견 확대, 기간제 근로자는 현재 일자리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진실 앞에 자꾸 ‘아니다’라는 말이 붙어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최근 겪었던 3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50대 후반의 전직 대기업 임원은 대기업 임원까지 했기에 은퇴 이후에도 갈 곳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국 경비 자리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보험설계사를 하게 됐다. 이 장관은 “5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하는데, 파견직종을 확대하고 파견기간을 폐지해달라는 게 그의 당부였다. 국가가 안정되게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업에 종사했던 50대 초반의 퇴직자는 제조업 단기파견을 6개월마다 돌아다니고 있다. 파견규제 탓에 6개월마다 회사를 옮겨야 해 퇴직금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 엑스레이 기사로 일한 여성 근로자는 기간제로 일한 지 2년이 됐다는 이유로 기약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됐다. 이 장관은 “가장 어려운 취약계층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부·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각종 설문에서도 노동개혁 법안에 대한 지지의사를 내비치는 국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매일경제와 한국리서치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노동개혁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파견법에 찬성하는 비율은 63.5%로 반대(25.7%)를 크게 앞섰다.
그러나 노동계와 야당은 여전히 반대논리에 매몰돼 있는 상황이다. 파견법을 개정하면 500만명이 파견근로자로 내몰릴 수 있다는 근거없는 주장으로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노동계·야당은 고령자 366만명, 고소득 전문직 75만명, 뿌리산업 근로자 42만명을 단순 합산해 500만명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32개 파견허용 업무의 임금근로자 470만명 가운데 파견근로자는 1.33%인 6만 3000명에 불과하다. 노동계와 야당의 논리대로라면 파견허용 업무에 종사하는 임금근로자 470만명 전원이 모두 파견근로자여야 한다.
이 장관은 “진보언론에서도 현재 비정규직 제도는 정규직 전환 효과는 적고, 용역·하도급·임시 일용직으로 흘러가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이에 법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 노사정 각 주체와 정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지만, 책무를 다 하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최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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