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작가의 소설 '불신시대' 속 한 구절입니다. 한국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홀로 살던 진영은 혼란과 타락의 사회를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시대'라 규정합니다.
'불신시대', 소설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어제 새벽, 서울지하철 2호선에 화재가 나 승객들이 대피했습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초기대응이 또 문제가 됐죠.
지하철이 비상정지를 했는데 승객들에게 기다리란 말을 하곤, 3분이 지난 후에야 대피 방송을 한겁니다. 그 사이 불안했던 일부 승객들은 스스로 탈출을 했죠. 서울메트로 측은 매뉴얼대로 했고,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왕십리역 추돌사고, 또 지난해 한성대입구역 정지사고 때도 승객들은 지시를 어기고 스스로 탈출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될까요.
'기다려라'
승객들이 들은 첫번째 안내방송이었습니다.
내가 탄 지하철에 불꽃이 보이고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다음 조치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하나 더, '객실이 더 안전하니 기다려라' 많이 듣던 말이죠?
세월호 사고가 참사가 된 결정적 한 마디, '나오지 말고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라'는 이 말은 믿어선 안 된다는, 지시에 따르면 죽을 수도 있다는 교훈 아닌 교훈을 만들어냈고,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다리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금기어가 됐다'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은 국가 정책의 제1 기준이 됐습니다. 하지만 3년이나 지났음에도 국가 안전시스템은 늘 우왕좌왕, 제대로 작동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경주 지진이 발생했을 때 긴급 재난문자가 9분이나 늦게 발송됐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이렇게 소설 속 혼란과 타락으로 뒤엉킨 불신의 시대는 국정농단과 미비한 안전시스템, 그로인해 국가를 믿지 못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찬 소설 속 주인공 처럼 '불신시대'를 살아야하는 우리가 그저 딱할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