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과 법률의 대원칙들이 구호나 구두선에 그치게 해선 안 됩니다.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도 정작 유죄추정이 원칙인 것처럼 재판한다든지, 공판중심주의라면서도 실제로는 수사기록중심주의로 재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27일 이상훈 대법관(61·사법연수원 10기)이 6년 임기를 마치고 33년 반 동안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본관 2층에서 이 대법관의 퇴임식이 열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국에 법원을 떠나며 작심한 듯 "(바른 재판을 위해) 법관은 이래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 대법관은 "사건의 결론을 섣불리 내려두고 거기에 맞춰 이론을 꾸미는 방식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치밀한 논증을 거쳐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 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어 "법관이 재판하는 것은 고민을 거듭하는 고단한 일이어야 한다"며 "법기술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이 대법관은 권력을 사법적으로 통제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건의 여러 사정을 지나치게 고려한 나머지 법을 유명무실화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함부로 끌어 쓰는 것은 위험하다"며 "국가경제와 기업의 안위를 아예 도외시해서는 안되겠으나 그것이 법원칙을 압도할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조세법률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실질과세원칙을 들이밀어 형해화(유명무실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국고가 빌 것 같다는 걱정을 법관이 앞세울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는 "법해석을 맡고 있는 법관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모두 아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형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허약한 쪽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법관은 "취임식 때 '그런대로 괜찮은 대법관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애만 쓰고 이룬 것은 없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박근혜 대통령(65)의 탄핵심판 여파로 당분간 대법관 공석 사태가 불가피한 데 대해선 "후임 대법관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떠나게 돼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빨리 이런 상황이 끝나기를 고대한다. 우리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며 퇴임사를 마쳤다. 관행적으로 제작·상영한 퇴임기념영상은 이 대법관이 만류해 이례적으로 매우 단촐한 퇴임식이 됐다.
이 대법관은 퇴임 후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서 당분간 후진 양성에 힘쓸 계획이다. 그는 법원행정처 차장이던 2011년 양승태 대법원장(69·2기) 후임으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른바 '독수리 5형제'로 불린 박시환·김지형·김영란·이홍훈·전수안 전 대법관이 퇴임한 이후 보수색이 짙어진 대법원에서 이인복 전 대법관과 함께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목소리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법관은 2012년 4월 시국선언을 주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간부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에서 "정부 정책 등에 비판 의사를 표시하며 개선을 요구한 것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2015년 1월 내란음모·내란 선동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에게 징역 9년의 원심을 확정할 때 내란 선동 유죄 판결에 반
이 대법관은 광주제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제1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판사로 임관해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심의관,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인천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이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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