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법원이 유해용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법조계에서 나온 말입니다. 압수수색 영장이 90%나 기각된 와중에, 그나마 확보한 증거가 있어 청구한 구속영장이었건만 이마저 기각됐으니까요.
법원 영장전담판사가 밝힌 이유는 이겁니다.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구속의 사유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 한마디로 구속할 만한 죄가 없다는 건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3천600자'나 동원했습니다. 통상 구속영장 기각 사유는 '법리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등 4~5줄로 간략하게 요약해 통보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법원이 혐의 성립 여부를 사전에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 또 재판 시작 전에 결론이 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는 그런 행동을 왜 했을까요.
지난 2월 퇴직한 유 전 판사는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 재직 시절 취득한 수만 건의 기밀문건 파일을 반출했고, 근무 당시 관여했던 소송을 퇴직 후 변호사가 돼 수임하는 등 총 5가지 혐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구속영장 재판 판사는 유 전 판사가 갖고 나간 문건은 비밀유지가 필요한 게 없었고, 그렇다면 공무상 비밀 누설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이를 개인적으로 사용할 의도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영장에 기록된 증거들은 이미 수집됐고 그에 대한 처벌도 미약한 수준이기에 구속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럼 '재판 자료는 재판의 본질이므로 압수수색조차 할 수 없는 기밀자료'라며 영장청구를 기각했던 건 뭐였을까요. 거기다 유 전 판사가 검찰에 증거인멸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도 문서와 저장장치를 파쇄한 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올여름 사법 농단 의혹이 터져 나온 뒤, 국민 10명 중 6명은 사법부 판결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 식구의 변명을 위해 3천600자를 동원하고, 또 옹호를 위해 거대한 돌담을 쌓는다면 천칭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해용 판사 영장 기각'을 보는 법원, 또 법관들의 마음 속 천칭은 과연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