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인 내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선정했습니다.
오늘(31일) 보훈처는 2019년이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것을 기념해 그 동안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 중 3·1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공로가 큰 인물을 재선정하며, 유관순 열사를 1월의 독립운동가로 앞세웠다고 밝혔습니다.
열사는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고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습니다. 이듬해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열사는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열사는 5명의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했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열사는 고향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했습니다.
열사는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 주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을 독려했습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제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이를 본 열사의 모친도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일제 헌병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열사는 군중을 이끌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그날 저녁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돼 천안헌병대로 압송됐습니다.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열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대문 감옥으로 옮겨진 열사는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지속해서 만세를 불렀고,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수감 중인 동지들과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던 열사는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고, 고문 휴유증과 열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에서 18살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