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호텔월드 채율에서 과다니니 투린을 안고 있는 김봄소리. |
A. 올해 초 뉴욕필에서 연례행사로 하는 신년 축하음악회와 갈라 콘서트를 함께 하는 행사가 있어요. 거기에 제가 솔로이스트로 초대를 받게 되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작곡가 '탄둔'의 곡을 미국에서 초연하게 되었어요. 그분이 작곡하신 'Fire Ritual' 이라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곡이 아니고 굉장히 특이한 장치들이 많은 곡이었죠. 예를 들면 제가 객석에서 앉아 있다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면서 연주를 한다거나, 관악기 주자 몇 분이 객석 쪽에 배치가 되어 지휘자 선생님과 저를 한번 봤다가, 객석 쪽을 한번 봤다가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굉장히 재미있게 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 그게 뉴욕필과의 제 데뷔 무대이기도 해서, 저에게는 의미가 큰 공연이었어요. 또 제가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석사와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졸업을 했는데 그 학교가 링컨센터에 속해 있는 학교예요. 늘 뉴욕필 공연에 자주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뉴욕필과 데뷔를 하게 되어 굉장히 기뻤습니다.
↑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에서 열린 뉴욕필 신년음악회 공연. |
A. 지금 막 스위스 게슈타트에 갔다 왔는데요, 올 2월 달에 한국, 홍콩 등 아시아 투어를 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유럽투어를 같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왜냐면 제가 1월 달에 라파우 블레하츠와 함께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앨범을 냈거든요. 그 앨범을 내고 나서 그 프로그램으로 이번에 또 스위스에서 게슈타트 메뉴힌이라는 정말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을 딴 페스티벌에서 데뷔를 같이 하게 되어 굉장히 좋았죠. 제가 게슈타트는 처음 가봤는데, 그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답고 정말 저는 평생 보지 못한 그런 풍경을 봐서 그냥 그 자체로 너무 힐링이 되었고, 많은 영감 받고 왔어요.
↑ 도이치 그라모폰 발매 음반, 김봄소리와 라파우 블레하츠. |
A. 라파우 블레하츠를 잠깐 소개 하자면, 2005년에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쇼팽 콩쿠르에 한국인 최초로 3위에 입상했습니다. 굉장히 큰 뉴스였는데, 그 당시 콩쿠르에서 2위없는 1위를 한 사람이에요. 피아니스트로서 매우 큰 상을 탄 후로도 굉장히 좋은 커리어를 쌓고 있는 유명한 음악가죠. 저도 그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2016년 제가 폴란드에서 열린 비에냐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2위 입상을 하고 얼마 안 있다가 그냥 평상시처럼 이메일 확인하는데, 라파우 블레하츠라는 사람이 자기가 피아니스트이고, 어떤 레이블 소속인데 함께 음악을 하고 싶다고 메일이 온 거예요. 콩쿠르 영상을 잘 봤고 팬이라고 하면서요.
처음에는 이게 스팸 메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답장을 했는데, 정말 라파우 블레하츠였던 거예요. 정말 꿈만 같았죠.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최고의 레이블에서 함께 음반을 내자고 하는데 믿기지 않았어요. 당시 저는 음반을 한 번도 낸 적이 없었던 상태였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벌써 한 3년째 되었죠. 저희가 같이 앨범을 내고 투어를 다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에요.
Q. 김봄소리씨의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쇼팽 녹턴 op.20 이나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고 있자면 듀오 연주자가 사랑에 빠진 거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A. 사실 음악을 연주할 때 만큼은 정말 그런 감정이 들 때가 많아요. 항상 연주할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하겠지만, 어떨 땐 로맨틱한 부분들이 특히 더 많이 다가오기도 하고요. 그 피아니스트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더 로맨틱하게 들릴 때도 있죠. 정말 제가 사랑하는 소리일 때도 있어서… 이에 대해 대답을 할 때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정말 사랑의 대화를 한다고 봐도 무방해요. 사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아마 들으실 때 굉장히 사랑이 넘치는 순간을 보내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웃음)
Q. 2017년에 워너클래식스에서 데뷔 앨범이 나왔고, 2019년 1월에 라파우 블레하츠와 듀오 앨범이 나왔다. 음반이 전세계 발매된 이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듯한데, 김봄소리씨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A. 일단 앨범을 발매하게 되면서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죠. 제가 고민하는 주제가 많이 달라졌어요. 제가 처음으로 녹음한 곡이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쇼스타코비치 1번 이었는데, 비에니아프스키 협주곡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녹음을 했던 곡이죠. 쇼스타코비치도 마찬가지고…그래서 '전설적인 분들이 녹음을 했던 곡인데, 내가 녹음 하나 더 하는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하는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저는 처음 녹음하는 거지만, 청자 입장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같은 곡을 하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확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나만의 목소리를 담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고민이 큰 전환점이 되었고 그때부터 제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지게 됐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음반을 녹음해서 CD를 판매하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스트리밍으로 들으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 스트리밍이 어디서 이뤄졌는지를 볼 수 있는데, 제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에서도 제 음악을 듣는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음악적 책임감도 생겼고요.
↑ 워너클래식 비에니아프스키 & 쇼스타코비치 데뷔앨범. |
↑ 도이치 그라모폰 라파우 블레하츠 & 김봄소리 듀오 앨범. |
A. 생각해 보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사실 많은 시간이 지났잖아요. 올해 4월에 무지크페라인을 다시 갈 일이 있었어요. 무지크페라인에 상주하는 톤퀸슬러 오케스트라와 드보르작 협주곡을 연주하러 비엔나를 찾았죠. 10년이 지나 다시 찾으니 느낌이 새롭더라고요. 그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많이 보이고요. 그때는 사실 어려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 무대가 역사적인 큰 무대거든요. 황금홀은 빈필하모닉이 늘 신년음악회를 여는 역사적이고 영광스러운 홀이죠. 그 어린 나이에 그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게 아직도 감사해요. 솔로이스트로 서울예고 오케스트라와 금난새 선생님과 함께 베토벤 트리플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그 때 음원이 아직도 있어요. 아직도 설레네요.
Q. 21세이던 2010년엔 제 4회 센다이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고, 2018년엔 문화예술발전유공자로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까지 10년 이상 많은 상들을 받았다. 그 중 특별히 생각이 나거나 애정하는 상이나 무대가 있는지.
A. 제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해서 부모님께서 대리 수상하셨어요. 그 날 독일에서 폴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 공연을 했거든요. 오케스트라는 폴란드에 있는 포즈난 오케스트라였고 폴란드 대통령, 그리고 독일 대통령이 모두 오셔서 맨 앞자리에 영부인들과 함께 앉았어요. 저는 한국인인데,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가로서 그런 무대에 섰다는 게 굉장히 신기했죠. 덕분에 폴란드에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어요. 그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계기가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였어요. 2016년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콩쿠르여서 그런지 가장 생각이 많이 나고, 그 콩쿠르로 인해 많은 인연들이 생겨서 더 소중해요.
Q. 팬들 입장에서 보면 2016년 콩쿠르 심사 결과가 잘못됐다고 여론이 들끓었었다. 당연히 김봄소리 씨가 1위가 되었어야 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본 많은 세계인들이 분노했고, 언론에 큰 이슈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일 때문에 라파우 블레하츠와 인연이 닿았을 수도 있겠다.
A. 저는 심사위원을 위해서 콩쿠르에 참여해 연주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등수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아요. 폴란드가 클래식에 푹 빠져 있는 나라거든요. 당시 그 콩쿠르가 라이브 방송으로 나갈 정도로 남녀노소가 클래식을 정말 사랑하는 나라여서 국민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기에 이슈화됐고,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분들도 만났어요. 또 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파우와도 인연이 닿을 수 있었던 콩쿠르였죠. 저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콩쿠르였던 것은 확실해요.
Q. 지나간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서울대 재학시절에 바둑 동아리와 클래식 기타 동아리 활동을 했고, 서울대와 동경대 바둑 교류전에도 나갈만큼 바둑을 좋아했던 것 같다.
A. 바둑을 늘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 처음 바둑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게임이었어요. 아버지랑 할 수 있는 게임이 바둑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께 조금씩 배우다가 기원에 다니게 되면서 기원에만 붙어 살았어요. 너무 재밌어서…바이올린 연습도 하기 싫고 바둑만 두고 싶은 거예요.
근데 바둑을 두면 둘수록 어려워지고 배울 것도 점점 더 많아지더라고요. 바둑이라는 게 항상 수 읽기를 해야 하고 멀리 볼수록 더 좋은 게임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의 교훈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늘 바둑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오래하고 싶었는데 예중을 거쳐 예고로 진학하게 되면서 기원을 다니게 될 시간이 없어서 못하게 됐어요. 집에서 게임으로 인터넷 바둑만 뒀죠. 그래서 아련한 첫사랑 같은 그런 게 있어요. (하하)
한 번은 바둑을 너무 다시 두고 싶어서 대학교 때 바둑부를 찾아갔어요. 여자도 거의 없었고, 음대생은 저 한 명 이더라고요. 근데 다들 인생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좋은 분들이었어요. 제가 볼 때는 굉장히 멋있었죠. 그 분들과 대학교 때 바둑을 두며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동경대 교류전 준비한다고 바둑부의 사부님들에게 특훈을 받고 밤새 준비해서 교류전에 나간 적도 있었죠. 정말 재밌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 폴란드 포즈난 필하모니 홀에서 포즈난 필하모닉 상주 음악가 연주, |
↑ 폴란드 포즈난 필하모니 홀에서 포즈난 필하모닉 상주 음악가 연주. |
A. 상주 음악가 제도라는 게 모든 오케스트라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보통은 아티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한 차례 이벤트로 연주를 하게 되기 때문에 한 오케스트라와 이렇게 1년에 두 번 넘게 연주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이 제도가 있는 오케스트라에서 상주 음악가로 선정이 되면, 한 오케스트라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같이 연주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더 깊게 알아 갈 수 있고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교류할 수 있어요. 제가 2018~19년 포즈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음악가가 되면서 포즈난 뿐 아니라 베를린, 밀라노, 프라하 등 여러 나라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이렇게 한 오케스트라와 깊게 교류한다는 것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 터키 최대의 일간지 Hurriyet 인터뷰 기사. |
A. 제 다음 2019~20의 상주음악가로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 선생님이 선정 됐어요.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Q. 봄소리씨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주변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을 것 같다. 부모님은 당연하고, 제가 보기에는 매니저 그레고리 코토우씨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A. 매니저가 여러 분 계신다. 그 중 모든 것을 같이 계획하고 진행하는 총괄 매니저(General Manager)는 그레고리 코토우라는 분이에요. 예전에 시마노프스키 콰르텟의 퍼스트 바이올린이셨는데, 매니지먼트 업계 쪽으로 옮기시면서 저를 아티스트로 영입하셨죠. 그 이후로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 상의하거나 같은 음악가로서 사소한 고민이나 걱정들을 나누기도 해요. 정말 많은 힘이 되는 분이에요.
↑ 독일 라인가우 페스티벌 데뷔에서 제네럴 매니저 그레고리 코토우와 피아니스트 미하일 리피츠와 함께. |
A. 제가 먼저 제안할 수도 있고 그 쪽에서 제안을 해올 수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감사하게도 비에냐프스키 콩쿠르가 끝난 후 에이전시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Q. 김봄소리 연주에 대해 어떤 팬은 '기대와 희망이라는 것들을 삶에서 자연스레 묻어둔 선물 같은 연주'라고 평했다.
A. 정말 좋네요. 제가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싶네요. (하하)
Q.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팬이 있는지.
A. 센다이에서의 연주가 가장 특별하게 기억에 남아요. 당시 센다이는 대지진이 났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제가 아는 사람들과 장소들이 폐허가 됐다고 하니 너무 걱정이 되더라고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 곳을 찾아 갔는데 너무 슬펐어요. 제가 머물렀던 호텔과 홀이 다 무너져 있었고, 공항도 다 폐쇄됐죠. 이렇게 큰 재난이 왔는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마음으로 연주를 마쳤는데, 센다이에 계시는 분들이 눈물을 보이며 제 연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저는 오히려 더 큰 위로를 받았어요. 그런 어려운 순간에 제가 큰 힘이 못 될 수도 있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한 분 한 분을 위해 진심으로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Q. 몸의 일부인 바이올린 얘기이다. 과다니니 크레모나와 과다니니 투린이 나이로는 20살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다른가.
A. 지금 쓰고 있는 악기는 과다니니 투린 이고, 1774년 산입니다. '투린'은 이탈리아 지방 이름이에요. 이탈리아 투린에서 만든 악기라는 뜻이죠. '과다니니'는 성이에요. 제가 지금 쓰는 것는 J.B 과다니니고 그전에 쓰던 것은 주세페 과다니니였어요. 그러니까 사촌지간 정도 되는 사이인 거죠. 악기는 사실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색깔이 다 다르게 나요. 그래서 악기가 저에게 오는 것도 굉장한 운이 필요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악기는 4-5년 정도 쓰고 있는데, 조금 어둡고, 깊고, 또 엄청 소리가 큰 악기는 아니에요.
반면에 제가 그 전에 쓰던 악기는 조금 더 밝고 소리도 크고 활발한 느낌이 나는 음색을 가지고 있어요. 두 악기가 굉장히 다른데, 전에 썼던 바이올린도 굉장히 제가 좋아했던 악기고, 이번 악기도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색과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어서 아직도 정말 재밌게 쓰고 있어요.
Q. 설명을 듣다 보니 악기마다 성격이 다른데, 그 다른 성격의 악기로 같은 작품들을 연주할 때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나.
A. 사실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악기를 골라서 쓸 수 있으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할 수는 없거든요. 악기 자체가 워낙 가치가 높기 때문에, 숨겨진 소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명기 같은 경우는 좋은 아티스트 분들이 많이 썼기 때문에 그 분들이 입혀 놓은 색깔들이 있어요. 그 악기가 주는 영감을 찾아내는 게 재미있는 일이죠. 또 이 곡과 이 악기는 정말 안 맞을 거 같은데도 막상 써 보면 또다른 색깔이 발견되기도 해요. 한 악기 안에서도 여러 색깔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큰 재미이죠.
Q. 이렇게 훌륭한 악기에 봄소리씨의 색깔이 잘 입혀지길 바란다.
A. 벌써 제가 처음 받았을 때와 지금은 굉장히 많이 달라요. (웃음) 악기소리가 그렇게 닮아가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쓰는 악기의 소리가 저에게 맞게, 더 좋게 변하고 더 깊어져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낼 수 있다고 느껴요. 제가 그 악기를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제가 바뀐 거죠.
Q. 존경하는, 혹은 뛰어넘고 싶은 롤모델이 있다면.
A. 제가 뛰어넘기는 불가능하지만, 굉장히 존경하는 은사님이신 김영욱 교수님을 롤모델로 삼고 싶어요. 음악적으로도 물론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시지만, 인격적으로도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에요.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이라면, 안네 소피 무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활동을 하셨음에도 연주 퀄리티가 대단하신 분이거든요. 연주 뿐만 아니라, 안네 소피 무터 재단을 만들어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일도 하신다는 점이 연주자로서, 음악인으로서 존경할 부분입니다.
↑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서울대학교 교수와 김봄소리. |
A.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얘기할 때마다 굉장히 부끄러워요. 어떤 얘기를 해 줘야 될지도 모르겠고요. 사실 학교 다닐 때부터 제가 이렇게까지 연주활동을 해외로, 크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국제 콩쿠르 준비하는 학생들 얘기를 멀리서만 듣곤 했죠. 제가 대학교 와서 대단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제 커리어의 문이 하나씩 열리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바라고 원하다 보면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한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정말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요. 그 다음 정말 집중하고 선택해서 준비했으면 좋겠다고요.
Q. 힘든 시기가 있었을 것 같다. 그 시기의 에피소드와 극복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A. 보통 슬럼프가 왔다고 하죠. 근데 제가 생각할 때 제 인생에는 아직 슬럼프가 오지는 않은 거 같아요. 슬럼프라고 할 만큼 길게 우울하거나 일이 안 풀리는 기간이 오래 되는 경우는 없었는데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되돌아보면 2015년의 콩쿠르이지 않을까 싶어요.
2015년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나가고 바로 이어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갔을 때였어요. 3주를 사이에 두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임박한 상태였죠.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한 달 정도 하거든요. 콩쿠르 마지막 일주일 내내 악몽도 꾸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곧바로 또 다른 콩쿠르를 나가게 된 거죠.
그때는 정말 힘들어서 못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렇게 힘든 순간이 오니 제 안에 있는 욕심들을 다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결국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거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한 번도 연주 안 해본 곡을 해야 했어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준비를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결과에 상관없이 '나만의 메시지를 보여주자, 내가 준비한 만큼의 솔직한 모습을 보이자'라는 태도로 연주했더니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많은 분들이 그런 진심을 느끼고 응원해 주셨죠. 슬럼프가 왔을 때 사실은 굉장히 힘들고 아프잖아요. 그런데 그 아픔을 성숙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Q. "데뷔 하고나서가 진짜 다르다, 초심자의 입장으로 연주한다. 다시 초청을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렇게 한다." 라고 얘기했는데.
A. 저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거의 7년간 콩쿠르를 했습니다. 사실 콩쿠르를 할 당시에는 이게 제 데뷔인 줄 알았어요. 콩쿠르를 하면 관객들을 만나고, 끝나고 갈라콘서트도 하니까요. 그런데 콩쿠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정식 무대에 다시 초대를 받는 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이고 그때부터 프로페셔널로서 카운트가 되더라고요. 처음 시작한 입장에서는 어떤 연주 제안이 오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렵더라고요. 지금 배우고 있는 단계인데, 제가 하는 무대 하나하나가 망치면 안 되는 중요한 곳이거든요.
제가 처음으로 김봄소리 이름으로 데뷔 음반을 내고, 그 음반으로 무대를 찾아 연주를 하는데 그 곳의 사람들은 저의 배경을 몰라요. 그냥 김봄소리가 온 거죠. 만약 그 무대 직전에 저에게 굉장히 힘든 연주가 있었거나 해도 사람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때문에 이 프로페셔널한 공연들은 가장 프레쉬한 모습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 부분들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고 부담도 됐지만, 책임감이 더 생겼죠.
Q.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초연결시대이다. 연주를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김봄소리씨도 진정한 세계시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초연결시대 세계시민의 조건은?
A.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래도 말해보자면 '오픈마인드(Open Mind)'가 중요한 것 같아요. 독일, 폴란드, 미국 등 각각 나라마다 특색이 있는데, 그런 다름을 오픈마인드로 보면 배울 점이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 폴란드에서는 어린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익숙하게 느껴요. 공연 리허설 때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견학을 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죠. 아이들을 위한 개방된 연주회가 보편화 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런 것들을 오픈 마인드, 즉 열린 마음으로 보면 배울 점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요.
Q. 마지막 질문이다. 10년 후의 김봄소리는 어떤 모습인가?
A. 10년 후의 김봄소리요? 저는 10년 후에 지금 하고 있는 연주를 더 많은 나라에서 더 많은 분들을 위해서 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싶고요. 더 좋은 음악가들과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들을 찾아가서 연주하는 기회도 더 많이 가지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정말 바라는 연주들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서고 싶고 의미가 있는 무대는 연주 투어로 진행하는 무대인 것 같아요. 내년과 내후년에 잡혀 있는 무대들 중에 오케스트라와 투어가 많거든요. 투어를 하면 오케스트라와 여러 번 호흡을 맞추게 되니 특별한 관계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브로츠와프 오케스트라와 미국 투어를 하게 됐는데요, 이 기회를 계기로 음악가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싶습니다.
고귀한 흰 빛이란 뜻을 지닌 알프스의 영원한 꽃, 에델바이스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눈 속에 피는 꽃!
조그마한 얼굴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예쁜 미소와 포레의 바이올린소나타를 연주할 때의 열정이 주는 몰입과 카타르시스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세계 곳곳에서 K클래식을 수 놓으며 기쁜 마음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는 그녀의 미소를 떠올리며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매일 아침 너는 나를 반기네
작고 하얀
맑고 환한
너는 나를 만나면 좋은거니
눈 속에서 피어나 꽃피고 자라는 구나
꽃피며 자라다오 영원히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내 고향을 영원히 지켜다오.
이 가사가 그대로 김봄소리이다. 눈 속에서 피어나
오는 29일, 수원시립교향악단과 객원지휘자 장윤성의 지휘로 연주될 알반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기 위해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김봄소리가 해석하는 알반베르크가 궁금해진다.
[배양숙 글로벌INSIGHT포럼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