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버스에 탔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맞아요".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가 이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와 마주쳐 그의 몽타주 작성에 참여했던 A 씨는 지난 9월 경찰의 최면 수사에서 이춘재의 사진을 보고선 이같이 말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의 한 농수로에서 안모(당시 54세) 씨가 숨진 채 발견된 화성 7차 사건이 발생한 1988년 9월 7일 늦은 밤 A씨는 이 농수로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에 탄 이춘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이같은 A 씨의 기억을 31년 만에 끄집어낸 최면 수사가 진범 논란이 불거진 8차 사건의 진실도 밝혀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립니다.
화성사건을 수사하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오늘(4일) 8차 사건의 범인으로 특정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해온 윤모(52) 씨에 대한 4차 참고인 조사에서 최면수사를 진행합니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당시 13세) 양의 집에서 박 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현장에서 수거한 체모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방사성동위원소 감정을 의뢰한 결과 윤 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내용을 전달받고 이듬해 7월 그를 검거했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윤 씨는 같은 해 10월 수원지법에서 강간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습니다.
그는 2심 때부터 경찰의 강압수사로 허위자백을 했다며 무죄를 주장했고 최근 이춘재가 8차 사건을 포함한 화성사건 10건과 다른 4건 등 모두 14건의 살인을 자백한 뒤에는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의 진범을 가려내야 하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최면수사 카드를 꺼냈습니다. 화성사건에서 최면수사가 이뤄지는 것은 버스안내양 A 씨 때에 이어 이번이 2번째입니다.
최면수사는 몸과 마음이 이완된, 즉 매우 편안해진 상태를 만든 뒤 특정 대상에 관한 집중력을 향상시켜 당시 상황을 끌어내는 수사기법입니다.
CCTV 등 물리적 증거가 마땅치 않을 때, 피해자나 목격자를 최면 상태로 유도해 해당 사건과 관련된 기억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 수사 단서를 찾아내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최면수사를 통해 확보한 진술은 피고인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증거로 채택될 수 있어 보통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경찰은 현재 수사 단서로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화성사건의 경우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된 상황이어서 버스안내양 A 씨와 이번 윤 씨에 대한 최면수사 결과는 어차피 법정에서 쓰일 수 없습니다.
다만, 경찰은 진실규명을 목표로 하는 이번 수사의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최면수사 결과를 근거로 삼을 방침입니다.
경찰이 이날 윤 씨를 상대로 최면수사를 진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이 사건과 관련된 자료라고는 당시 경찰이 작성한 각종 수사서류와 법원의 판결문 등이 전부인데 윤 씨 주장대로 그가 강압수사를 받아 허위자백을 했다면 이 수사서류 또한 허위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최면수사를 통해 윤 씨가 체포 이후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와 현장검증 상황 등에 대한 그의 기억을 되살려 진실에 한발짝 접근한다는 계획입니다.
윤 씨 측은 과거 윤 씨에게서 자백을 받아냈던 경찰들도 최면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윤 씨의 재심 청구를 돕는 박준영 변호사는 이날 "당시 수사관들은 '그때 윤 씨가 범인으로 검거돼 자백한 상황 등에 대해 잘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도(최면 수사를) 받으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경찰들에 대한 최면수사를 한다고 해도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최면수사의 특성상 피최면자의 의사
경찰 관계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을 지금 수사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차원에서 최면수사를 진행하는 것"이라며 "윤 씨를 수사했던 경찰들은 현재 강압수사는 없었다고 부인하는 상황이어서 최면수사는 실효성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