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때 심정으로 바짝 긴장한 미국행. 현지서 삼성 구단 프런트가 진행을 도와주기로 했으나 미국 스태프들의 출장으로 무산됐다. 이젠 진짜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걸 어쩌나. 무작정 내가 일하게 될 산타크루즈 감독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Hello”라는 첫 마디. “Hello my name is Q”라고 답했다. 나를 ‘Q(큐)’라고 소개했다고 들어서 알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구?”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당황했다. 다시 용기를 내서 “제 이름은 이규섭입니다. 한국에서 지난 5월에 은퇴한 농구선수입니다. 삼성 썬더스에서 농구를 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오, 코치 Lee?”라고 바로 알아들었다. “제가 언제 그곳으로 가야 하나요? 죄송하지만 제가 영어를 잘하지 못합니다”라고 예의를 갖췄다. 그러자 알아듣기 쉽게 9월26일까지 오라는 친절한 답변. 난 “땡큐”를 연발하며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래도 또 걱정이 들었다. 다짜고짜 예정에 없던 전화를 해서 혼자 막 얘기를 하고 끊었으니 실례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삼성 국제 업무 담당자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내 마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감독님은 괜찮다며 무한한 너그러움을 보여주셨다. 또 실수가 있었다. 날짜는 정했는데 시간을 물어보지 못했다. 고민을 하다가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이메일로 선택. 사전을 찾아가며….
언젠가 지금의 이 첫 발이 나에게 큰 힘이 되리라 믿는다.
산타크루즈 어시스턴트 코치로 첫 발을 내딛은 이규섭. 사진=이규섭 제공 |
집에 도착 후 짐을 나르는 일도 울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이민 가방은 12개. 짐을 풀고 정리하고 당장 쓸 생활용품을 사다보니 일중일 후딱 지났다. 여긴 모든 것을 혼자해야 했다. 가구를 사서 조립하고 조명을 사서 직접 설치하고…. 심지어 천장에 전등도 없었다. 한국이 정말 살기 편한 곳이라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26일. 산타크루즈로 운전을 하고 40분 정도 가자 조용한 시골 동네가 나왔다. 한국으로 치면 그냥 1층 가게 같은 곳에 푸른색 간판으로 ‘Santa Cruz Warriors’라고 적혀 있었다. 푸른 유니폼을 벗고 다시 본 푸른 간판은 반가웠다. 들어가자마자 케이시 산타크루즈 감독을 찾았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들 의외로 내 닉네임인 ‘Q’를 부르며 친절하게 맞이했다. 삼성이 전지훈련을 다녀간 직후였기 때문에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문제는 나다. D-리그인데도 스태프가 생각보다 많았다. 대충 12~13명과 인사를 나누면서 직함과 이름을 대는데 전혀 외울 수 없었다. 여긴 일일이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를 하는데 다음 만남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난 이름 외우는 걸 정말 못하는데….
"화이트맘바"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코치와 슛대결 승자의 위용. 사진=이규섭 제공 |
내 첫 일정은 이틀 뒤 오클랜드에서 시작됐다. 내가 듣기론 NBA 팀의 워크아웃이라고 해서 젊은 선수들을 테스트하는 정도로 알았다. 이때까진 그랬다.
오클랜드에 도착해 보니 어디에도 체육관이 없었다. 잘못 온 건가. 메리어트 호텔만 덩그러니 있었다. 할 수 없이 감독님께 전화를 했더니 마중을 직접 나와 호텔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감독님 숙소인가라고 생각하고 따라갔다. 그런데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Golden State Warriors’라고 써 있는게 아닌가. 알고 보니 5층은 체육관 6층은 골든스테이트의 사무국이었던 것이다. 체육관에는 코트가 3개나 있었고, 그 안에 웨이트트레이닝센터, 치료실, 식당, 샤워실, 라커룸, 분석실, 용품실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사무국에도 오직 농구단을 위한 직원이 엄청 많았다. 대략 100명을 예상해 본다. 엄청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졌다. 또 신기했던 것은 모든 곳에 구단 로고가 있다는 것. 심지어 바닥에 신발 터는 곳까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어색한 것은 또 이었다. 내 복장이다. 나만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감독님도 반바지에 티셔츠, 농구화 차림이었고, 구단 직원들도 구단 트레이닝복의 편안한 복장이었다. 앞으로 지급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면 된단다. 난 트레이닝복을 받은 뒤 곧바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운동시간 30분 전. 선수들이 미리 나와 슈팅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난 그냥 어린 선수들이겠지 생각하고 “여기서 몇 명이 NBA에서 뛰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냥 웃는다. 뭐지? 어쨌든 난 팀 훈련을 코트가 아닌 위에 올라가 봐야 했다.
훈련을 관전하는데 좀 특이했다. 선수들은 자율적으로 훈련을 했다. 골대 하나에 스태프 두 명이 붙어 자유롭게 슈팅 훈련을 했다. 스태프들(기술코치도 있고 스카우트도 있는 듯)이 선수들과 계속 대화를 했다. 경기 중에 나올 상황을 미리 준비했다가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선수들은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70%의 움직임으로 훈련을 반복했다.
그리고 선수들이 한 명씩 계속 코트로 나왔다. 코트 하나에 두 명 정도 짝을 이뤄 드리블과 슈팅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많이 본듯한 얼굴들이다. 유니폼 이름부터 확인했다. 이런! 앤드류 보거트, 스테판 커리, 데이비드 리, 저메인 오닐, 안드레 이궈달라…. 이건 진짜 NBA 팀 워크아웃이었던 것이다.
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포워드 겸 센터 데이비드 리와 인증샷. 사진=이규섭 제공 |
다음날도 오전 9시30분까지 오클랜드로 향했다. 여긴 오전 10시 운동을 한 뒤 오후 6시에 훈련을 재개한다. 하루 두 타임이다. 중간에 6시간이나 공백이 있다. 첫날은 대화 상대도 없고 코칭스태프 회의도 한 시간 만에 끝나고 5시간 동안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오전 운동을 마친 뒤 골든스테이트 스태프가 내게 와서 “준비됐냐”고 묻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코트로 나오자 골든스테이트 코칭스태프가 모여 있었다. 이런! 마크 잭슨 골든스테이트 감독이 내게 다가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한다. 설마 NBA 레전드인 저 사람도 같이 농구를 하는 건가? 같이 한다고 했다. 두 팀으로 편을 나누는데 같은 편이다.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코치들 중에는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같은 분들도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NBA에서 뛰었던 선수들인데….
첫 만남을 이룬 케이시 산타크루즈 감독과 다정한 포즈. 사진=이규섭 제공 |
경기 진행 방식은 풀코트로 15점 스코어제였다. 무려 7전4선승제란다. 무슨 NBA 파이널도 아니고. 두 시간 가까이 뛴 것 같다. 은퇴 후 오래 쉬었더니 정말 힘들었는데 중간에 쉰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한국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 진짜 이를 악물고 뛰었다. 다행히 우리가 이겼다. 난 2경기에서 끝내기 위닝 3점슛을 림에 꽂았다. 그러자 다들 와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빅샷! 빅샷!”이라고 좋아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나를 굉장히 아주 굉장히 호의적으
기회는 왔다. 나도 그 틈을 타 코트로 내려가 훈련을 보고싶다고 물어봤다. 그러자 마크 잭슨 감독이 “네가 이겼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껄껄 웃었다. 난 이제 코트에 있다. 그리고 이젠 나를 볼 때마다 먼저 다가와 악수도 해준다. 역시 남자들은 몸을 부딪히면서 놀아야 친해진다.
[전 삼성 농구선수/현 산타크루즈 어시스턴트 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