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은 “응용이 형”이라고 부른다. 무한한 친근감의 표현이다. 김응용은 “강 감독”이라고 칭한다. 후배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강병철이 야구계에서 ‘형’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은 김응용뿐이다. 김응용이 야구후배에게 이름 대신 직함을 쓰는 사람은 강병철뿐이다.
김응용과 강병철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를 극진히 존경해 주는 사이다. 둘은 걸어온 길도 비슷하고, 성격이나 야구관도 닮은꼴이다.
김응용과 강병철은 부산상고 5년 선후배 사이다. 그리고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한일은행과 국가대표에서 ‘거포 계보’를 주고받았다.
이들 둘은 강병철이 부산상고를 졸업한 1965년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전신)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홈런타자로 입지를 굳힌 김응용은 고교후배 강병철을 끔찍이 아꼈다.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피붙이가 귀했던 김응용은 강병철을 친동생처럼 대했다.
김해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강병철은 성격이 낙천적이고 느긋했다. 매사 긍정적이었다. 호랑이 같은 김응용을 강병철은 의지했고, 따랐다.
김응용과 강병철은 197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10년 가까이 한일은행 전성기를 이끌었다. 김응용은 4번 1루수, 강병철은 5번 3루수를 주로 맡았다. 김응용이 한일은행 선수에서 코치 겸 선수, 감독을 차곡차곡 거치며 올라갔듯이 강병철도 선수에서 코치 겸 선수의 길을 걸었다. 1973년 김응용이 한일은행 감독으로 승격하자 강병철은 주장이 됐다. 김응용은 자신의 후임으로 일찌감치 강병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강병철이 김응용의 품을 떠난 것은 1978년. 강병철은 김응용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와 동시에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동아대 감독을 맡았다. 강병철은 이전까지 한일은행 코치 겸 선수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김응용은 미국 연수중이었고, 강병철은 동아대를 지방대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국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동아대는 1981년 3관왕, 1982년 2관왕에 올랐다.
1978년 헤어진 김응용과 강병철은 딱 한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82년 말 김응용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에 부임할 때였다. 김응용은 가장 먼저 강병철을 찾았다. 당시 강병철의 주가는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대학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면서 프로구단 영입 1순위였다. 강병철은 김응용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택했다.
결국 둘은 다른 길을 갔다. 김응용이 해태에서 9차례 우승을 일궈 내는 동안 강병철은 롯데를 2차례 정상에 등극시켰다.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2차례가 모두 강병철의 손에서 이뤄졌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둘의 ‘남다른 정’은 변함없었다. 김응용은 사석에서 “강 감독이 선수들을 참 잘 만드는 것 같다. 대단하다”고 흐뭇해했다. 강병철은 “응용이 형은 스트레스
겉으론 무뚝뚝하고 멋없는 사나이. 하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 많은 남자. 김응용과 강병철은 지금도 서로를 염려하고 보듬는 야구계 최고의 선후배 사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