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표권향 기자] LG 트윈스가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했다. 비록 라이벌 두산에 1승3패로 져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지만 LG팬들은 가을축제를 맘껏 즐겼다.
양하윤 LG 장내 아나운서(26, 이하 직함생략) 역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LG팬이었다는 양하윤은 야구가 좋아 구단 아르바이트생으로 일을 시작했다. LG구단 마케팅팀을 거쳐 2년 전부터 잠실구장 마이크를 잡았다.
양하윤이 투수 우규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루수로 나선 ‘빅뱅’ 이병규가 좌익수가 된 사연 등을 털어놨다.
"야구는 인생이다"라고 제법 철학적 화두를 내던진 양하윤. 그녀가 말하는 야구와 LG에 대해서 들어보자.
양하윤은 야구가 좋아 구단 아르바이트를 통해 장내 아나운서가 됐다. 사진=김재현 기자 |
야구가 좋아 구단 아르바이트까지…
양하윤의 추억 속에는 야구장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어린 시절 주말마다 야구장으로 가족 소풍을 왔기 때문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아버지 손을 잡고 야구장을 찾은 양하윤은 자연스레 야구팬이 됐다. 그런 그녀에게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의 야구는 감동 그 자체였다. 학업에 쫓겨 야구와 잠시 이별했던 양하윤을 다시 야구장으로 불러들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학교에 입학해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다. 양하윤은 “무조건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야구 틀 안에서 숨 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양하윤은 프로야구 LG구단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봤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양하윤은 곧장 지원해 그해 여름부터 마케팅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양하윤은 “LG팬클럽 회원관리와 홈경기 운영을 담당했다. 중앙문 입구에서는 구단 초청권을 나눠주기도 했고 LG구단 내 이벤트에도 참가해 일을 도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생각과는 달리 야구를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하윤은 “야구구단에서 일을 하면 야구를 많이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을 하는 동안 야구를 아예 보지 못했다. 소리만 들었다”라며 속상해했다.
그런 그녀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장내 아나운서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이다. 양하윤이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던 구단 직원들은 그녀를 장내 아나운서로 추천한 것이다.
양하윤은 “이전 장내 아나운서들의 경력은 보통 9~10년이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야구를 보면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좋아하는 야구와 원하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장내 아나운서라 행복했다”라고 전했다.
양하윤은 야구를 인생에 빗대어 말했다. 기회를 놓치더라도 언젠가는 반전을 이룰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진=김재현 기자 |
“7번 이병규가 1루수 이병규야?”
2012년 시범경기를 시작으로 잠실구장의 마이크를 잡았다. 연습도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실전 투입이었다.
양하윤은 “”1번 타자 박용택“을 외칠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투수의 투구에 따라 실시간으로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분해 전광판에 띄워야했다, 정신이 없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긴장은 결국 실수를 낳았다. 양하윤은 “8회초 공격을 말해야 하는데 너무 떨려 ”8... 8... 8회 초“라고 말을 더듬어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병규 선수는 뒤에 숫자 7만 보고 좌익수라 소개했다. 그런데 등번호가 7번인 1루수 이병규 선수였다”라고 털어놨다.
초반 잦은 실수로 위축되기도 했다. 양하윤은 “한 번 실수라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목소리는 방송을 통해 야구장 전체로 울려 퍼지기 때문에 작은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하루는 9회말 2아웃에 채태인이 대타자로 준비하고 있었다. 내 자리에서 보였기에 나는 전광판에 채태인의 이름을 넣었다. 그러나 이건 초대형 실수였다”라고 말했다. 경기 규칙상 코치가 심판에게 말한 뒤 심판이 공식기록원에게 전해 장내 아나운서가 전광판에 이름을 수정하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양하윤은 심판이 방송실에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이름을 바꾼 것이다.
양하윤은 “처음에는 뭐가 잘 못됐는지 몰랐다. 채태인이 타석에 나서는 걸 상대 팀 더그아웃에서도 봤을 텐데 왜 잘못됐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야구는 세세한 작전으로 이루어지는 스포츠이기에 내가 경기 흐름을 망쳤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한 숨 쉬었다.
복잡한 야구룰(Rule)도 공부해야 했다. 양하윤은 “이전에는 기록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경기만 봤다. 저건 아웃이다. 저건 땅볼이고 뜬공이라고만 알았지 세세하게 파고들어 보진 않았다. 야구를 그토록 미치게 봤는데도 야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에 무안하기도 했다”라고 속이야기를 털어놨다.
실수를 줄이고 정확한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집중과 차분함이 동시에 요구됐다. 양하윤은 “경기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내 역할도 분명히 있다. 실수 없이 방송하며 전광판을 통해 팬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데 책임을 가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처음 장내 아나운서가 됐을 때 잦은 실수로 속이 상했다던 양하윤이다. 사진=김재현 기자 |
투수=장내 아나운서, 웃음 뒤에 외로움
양하윤은 특히 투수들을 선호했다. “타자는 자기 타석에서 기회를 놓치더라도 다음 타자가 해결해줄 수 있다. 하지만 투수는 넓은 운동장 마운드 위에 혼자 서있기에 외로워 보인다. 홈런을 맞은 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힘들겠다’란 생각이 들어 안쓰럽기도 하다”라고 했다.
투수와 장내 아나운서의 처지가 같다고 주장했다. 양하윤은 “투수의 공 하나에 팀의 운명이 갈린다. 때문에 어느 수비수 보다 집중을 더 해야 한다. 장내 아나운서 역시 야구장 소식을 전하는 책임이 있기에 방송 멘트와 전광판 관리 등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투수들에게 애착이 간다는 양하윤은 “나도 야구팬들과 같은 마음이다. 선수들이 나올 때마다 잘해줬으면 좋겠다”라며 “투수들이 좋은 볼을 던지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연속 볼을 던질 때에는 전광판에 볼을 누르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속으로 ‘잘 좀 던져봐! 잘 던질 수 있잖아’라며 응원 한다”라고 전했다.
마이크를 잡고 좋아하는 야구를 맘껏 볼 수 있다는 기쁨 뒤에 외로움을 느꼈던 양하윤이다. 양하윤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매 홈경기 때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선수들조차 양하윤의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아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양하윤에게 우규민은 최고의 선수다. 양하윤은 “우규민 선수의 투구폼이 좋다”라며 공을 던지는 흉내를 냈다. 이어 “야구도 잘 하지만 항상 인사를 잘 해준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지나치는데 우규민, 류제국, 오지환 선수는 항상 밝게 인사를 받아준다. 그 선수들은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참 고마운 선수들이다”라며 웃었다.
양하윤은 친절한 투수 우규민을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았다. 사진=김재현 기자 |
“야구는 인생이다”
양하윤은 지금도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응시하고 있다. 꿈이 있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양하윤이다. 그러나 매번 뜻대로 풀리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양하윤은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확고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낙방하니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에 접고 있는 시점이다”라고 했다. 이어 양하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외적인 부분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아나운서가 될 운명은 따로 있는 것 같다”라며 한 숨 쉬었다.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은 결국 야구였다. 양하윤은 “집에 가면 그날 경기 하이라이트를 챙겨본다. 홈경기일 때 포수 뒤로 희미하게 비쳐지는 내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또 매 홈경기를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지금이 좋다”라며 눈물 고인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 양하윤은 “내 스케줄은 LG 경기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선수들과 비슷한 생활 패턴으로 지내다보니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했다.
매일 야구와 함께 한 양하윤은 올 시즌 LG가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하는 것을 직접 봤다. 양하윤은 “야구는 기록을 남긴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역사다. 몇 년 뒤 그날의 경기가 떠올랐을 때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떨린다. 시간은 돌릴 수 없다. 역사의 한 장
양하윤은 “야구는 인생이다”라며 “항상 기회는 찾아온다. 이 기회를 잡으면 성공하는 것이지만, 만약 기회를 못 잡으면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언제나 반전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치고 힘들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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