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서민교 기자] ‘옆구리 투수’ 우규민(29‧LG 트윈스)의 옆구리에 낯선 목발이 4주째 붙어 있다. 올 시즌 종료 후 엉덩이 근육 물혹 제거 수술을 받은 탓. 갈색 머릿결이 찬바람을 스치던 11일 경기도 모처서 만난 우규민의 표정은 유난히 밝았다.
“사람과 좀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한 미소로 맞은 첫 인사가 반갑다.
↑ LG 트윈스 선발진의 기둥으로 자리잡은 우규민이 성공적인 재활을 확신하며 3년 연속 10승 투수 도전에 나선다. 사진=서민교 기자 |
우규민은 2013년부터 선발로 전향했다. 사실 2010년 경찰청 입대부터다. 새로운 옷은 어색할 틈이 없었다. 2013시즌 선발 첫 해 10승, 이듬해 11승을 챙겼다. 올 시즌 LG에서 유일하게 10승을 넘긴 명실상부한 선발진 기둥이 됐다. 그렇게 LG도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로 지난 10년의 암흑기를 벗어났다.
2년 연속 10승 투수 반열에 오른 우규민은 구멍 난 LG의 선발 역할을 다한 뒤 혹 하나를 뗐다. 지난해부터 통증이 있던 부위다. 공을 던지는데 지장은 없었지만, 허리에 부담을 주는 원인이었다. 올해 여름 통증이 심해졌다. 수술이 급한 상태는 아니었다. 더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수술 결단을 내렸다. 우규민은 최대 3개월을 꼬박 재활을 해야 하는 힘든 길을 택했다.
“큰 수술이 아니라서 걱정하진 않는다. 수술 결과도 좋고 준비도 잘하고 있다. 재활 경험도 있어서 괜찮다. 날씨가 추워져 아침에 일어나면 뻑뻑한 느낌이 들지만 걷는데 문제는 없다. 병원서 6주는 목발을 짚으라고 하더라. 걸을 때 아직 5대5로 체중이 실리지 않을 수 있고, 겨울이라 미끄러질 위험이 있어서 말을 잘 듣고 있다.”
우규민은 오전‧오후‧야간 재활훈련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지난주 위기가 있었다. 재활선수들에게 찾아오는 흔한 매너리즘. “예전에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할 때도 고비가 있었다.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활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더 좋아질 거란 믿음과 정성이 필요한 게 재활이다. 지난주 매너리즘에 빠질 뻔했다. 괜히 짜증나고 그러더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재활 전문가 향기마저 풍긴다.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 다른 데 신경을 쓰면 된단다. 요즘 꽂힌 것은 공부다. “골프를 좋아하는데 못 치니까 노트와 책을 펴게 되더라.” 도대체 무슨 노트와 책일까.
“올 시즌 내 투구 영상을 찾아보면서 지난 스프링캠프 때 적어놓은 상대할 타자 분석 노트를 비교하고 있다. 얼마나 잘 맞게 던졌나 확인 작업이다.” 우규민의 야구노트였다.
또 다른 책은 일본어 교제.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다. 일본에 갈 일이 많으니까 배워두고 싶었다. 시간과 여유가 없어 못했는데 이번에 한 번 해보려고 책을 보고 공부하고 있다. 일단 히라가나 가타가나부터 마스터를 하려고 시작했다.” 그리고 재빠른 대처. 우규민은 일본 진출을 위한 준비는 아니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규민의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합류 여부는 불투명하다. 코칭스태프의 결정을 따라야겠지만, 스스로 마음은 정했다. “팔이 아니라 왼다리다. 골반 활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다. 여유 있게 생각하기로 했다. 스프링캠프를 소화할 정도로 맞추긴 힘들 것 같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동료들을 위한 배려다. 자칫 민폐를 끼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스프링캠프는 어린 선수들을 포함해 모두 열심히 훈련을 한다. 1군 합류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런데 내가 캠프에 같이 가서 재활을 하고 있는 건 눈치가 보여서 안 된다. 분위기만 망칠 수 있다.” 팀 내 중고참이 된 우규민의 성숙한 판단이다.
단 내년 시즌 개막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시즌 개막까지는 시간이 많다. 그때까지 충분히 맞출 수 있다.”
↑ 야구가 더 좋아진 내일을 꿈꾸는 우규민의 행복한 미소. 사진=서민교 기자 |
우규민은 현재에 만족하는 투수가 아니다. 지금껏 꾸준히 변하고 진화했다. 최근 2년 연속 10승 투수의 반열에 올랐지만, 여전하다. 선발 전향 2년을 자평해달라고 했다. 예상 답변은 틀렸다.
“2002년 준우승 이후 LG에 입단해 암흑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선발로 전향한 뒤 2년 연속 4강에 진출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닌 팀이 잘 됐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선발투수로 나서 포스트시즌을 경험했다는 것이 기쁘고 만족스럽긴 하다.”
우규민은 LG의 토종 에이스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도 ‘에이스’라는 단어를 질색했다. 이유도 분명했다. “요즘은 에이스란 말을 너무 남발한다. 에이스는 등판했을 때 무조건 이겨야 하고, 연패 중에도 ‘오늘은 이겼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투수다.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에이스가 되면 우리 팀은 망한다. 굳이 말하자면 LG의 옆구리 에이스 정도? 그래도 2~3선발은 된 것 같다.”
우규민은 선발 전향 후 팀 선배 봉중근의 말을 늘 떠올린다. 봉중근은 “3년을 꾸준히 성적을 내야 이름을 기억하는 투수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3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해야 ‘나는 선발투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내년까지 10승을 해야 내 입으로 자신 있게 선발투수라고 말할 수 있다. 내년에도 하면 상당히 건방져 질 거다. 그러면 나도 에이스 아닌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지 껄껄 웃었다.
우규민은 올 시즌 팔각도에 변화를 많이 줬다. 릴리스 포인트를 위로 올려 예측 불가의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하곤 했다. 경찰청 시절 체인지업을 완성했던 것처럼 또 어떤 변화를 구상하고 있을까.
“지금은 재활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올 시즌 막판 구상은 했었다. 올해 던진 패턴을 조금 더 보완하는 정도다. 팔각도의 변화보다는 볼의 위력을 더 높이는 것에 집중을 할 계획이다. 타자가 점점 유리해지고 있기 때문에 투수라면 항상 변화를 줘야 한다. 그런데 팔각도를 위로 올리는 건 이제 눈치를 봐야 한다.”
재미를 봤던 결정구에 왜 눈치를 볼까. 차명석 수석코치와 강상수 투수코치 조합의 견제 때문이다. “예전부터 차명석 코치님이 팔각도를 위로 올리는 것에 반대를 많이 하셨다. 팔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에 오래 하라는 의미였다. 강상수 코치님도 같은 생각이시다. 지금은 차명석, 강상수 코치님이 둘 다 계신다. 위가 아니라 밑으로 던져야 할 것 같다. 밑으로 던지는 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지 모르겠다.(웃음)”
우규민의 선발 전향 성공 비결은 또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다. 시즌 때 징크스가 많은 스타일. 선발 등판일에는 항상 똑같은 루틴을 정해놓고 그대로 따랐다. 정리정돈이 생활화 돼 있는 성격대로다. 우규민의 올 시즌 등판일 루틴을 엿보면 이렇다.
오전 11시 기상→점심은 오므라이스→사우나→솔잎 향이 나는 특정 음료 한 캔→우회를 하더라도 뚝방길→잠실구장 도착
“중근이 형도 등판일에는 한국에선 장어덮밥, 미국에선 스파게티를 먹었다고 하더라. ‘저 사람도 징크스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루틴대로 했을 때 잘됐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징크스가 많으면 안 좋을 수도 있지만, 나에겐 더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규민이 루틴 얘기를 하면서 마냥 미소가 번진 것은 선발 전향 후 날짜가 정해진 로테이션 덕분이다. 등판일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자기관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얘길 하면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구가 더 좋아졌다. 야구가 잘 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간 게 재밌었다. 더 파헤쳐 보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든다. 그러면 뭔가 더 나올 것 같다. 야구가 더 좋아졌다.”
우규민은 또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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