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불문율’ 사고가 터졌을 때, ‘발끈’이었든 ‘위협구’였든 흥분한 쪽은 ‘심리적 상처’를 호소한다. 끄덕끄덕 들어주기 힘든 이유는 ‘이 팀은 또 언제 반대 입장이 돼서 다른 하소연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꽤 오래 지켜본 바, 이 판에서는 자주 그랬다.
‘불문율’ 논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불내로’로 표현되는 팀들의 흔한 이중잣대다. 매너 없는 도루와 안심할 수 있는 승부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의 팀들이 당황스러울 만큼 이기적이다.
얼추 비슷해 보이는 상황인데도 내가 뛰면 쐐기점을 얻기 위함인데, 남이 뛰면 ‘시체에 매질’이다. 내가 달아난 리드는 더 벌려야 하고, 내가 쫓아가야 할 열세는 그만 하면 됐다고 한다.
↑ 승리팀 한화의 9회초 도루와 9회말 두차례 투수교체가 나왔던 23일 수원경기 직후 패전팀 kt의 주장 신명철이 흥분하면서 잠시 양팀 선수단의 대치상황이 연출됐다. 사진(수원)=옥영화 기자 |
큰 점수 차에 뛰지 않고, 두들긴 상대 투수의 기분을 생각하고, 경기 막판에 중대한 의미가 없는 투수 교체를 자제한다?
이런 ‘불문율’은 한국 야구에 없다. ‘불문율’은 관습이다.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지키는 습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팀들은 ‘으레’ 저렇게 야구하지 않는다.
주자들은 자주 끝까지 뛰고, 타자들은 홈런 치면 화끈한 세리모니도 한다. 감독들은 때론 상대와 상황을 봐가며 다소 거북한 투수 교체로 ‘자극’도 하고 심리전도 건다.
흔히 이런 야구들을 하다가 벌컥 남의 이런 야구에 화를 낼 때 튀어나오는 단어가 ‘불문율’이다. 열심히 지키는 팀들은 적은데, 화를 내는 팀들은 많다. 안 지키던 팀도 반대 입장이 되면 화를 낸다. 화를 내던 팀도, 다시 언제든 안 지키는 팀이 된다. 이러니 심각한 불균형이다.
‘불문율, 가르쳐본 적은 있는가’. 야구인들에게 물어보면, 많은 경우 10초쯤 침묵이다. 대부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콜드게임이 있는 아마 때는 당연히 끝까지 악착같이 뛰는 야구를 한다. 프로에 와서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있던가, 갸웃거리는 선수들이 많다. 야구 선배에게 들은 적이 있긴 한지 우물쭈물한다. 우리는 점수 차 벌어지면 도루하지 말고, 누상에서 세리모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야구가 아니다.
불문율을 어겼다며 화내지 말고, 빈볼을 던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논란에서 죄 없는 ‘메이저리그의 불문율’까지 끌어다 따져봤자 우리의 문제 해결에 그리 도움이 안 된다. ML에서는 불문율이 맞다. 큰 점수 차가 벌어진 경기, 혹은 이닝에서 도루하지 않는다. 타석이나 누상에서는 세리모니가 거의 없다. 신인타자가 ‘오바’하다가 위협구를 부르는 경우는 있어도, ‘물’ 좀 먹은 빅리거 타자가 요란한 세리모니를 누상에서 펼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대체로 그런 야구를 하는 그들에게는 실체를 인정할 만한 ‘불문율’이 존재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ML의 매너 도루에 대한 불문율은 경기가 이미 끝났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 명언도 빅리그에서 나왔고, ‘신은 9회말에 온다’는 미지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예찬도 빅리그의 소설에서 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큰 점수 차에서 도루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승부가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이기는 방법, 승리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도루를 적절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큰 점수 차에서 기울여야 할 ‘승리를 향한 최선’에 도루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적 취향’의 합의가 있어서 그들은 그런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
ML 불문율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우리 야구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그만둘 수 있다. ‘몇회 몇점 차이면 안 뛰어야 하는데?’ 승부조작을 모의하자는 게 아니라면, 이 질문은 가장 의미가 없다. ML이 안 뛰는 것이 경기가 끝났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뛰는 이유 역시 진정 추가점이 절박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안심할 만한 객관적인 점수 차’, 존재할 리도 없는 그 수준을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올시즌 가장 지켜보기 괴로웠던 빈볼 충돌은 ‘선데이나이트 베이스볼’에서 나왔었다. 이번엔 상대팀에 대한 삿대질 비난이 토요일 경기다. 아이들과 함께 즐길 가족 여가로 권할 만한지 민망스럽다.
야구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런 ‘불문율’을 갖고 싶어 그러는 걸까. 그렇다면 더 많이 지키는 단계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지키는 팀과 화내는 팀의 불균형이 고쳐진다면, 그 때는 '매너 야구'의 매력에 대해 다른 말을 하고 싶다.
[chicleo@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