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美 알링턴) 김재호 특파원
실체를 드러낸 추악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2020년 1월 13일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그런 날로 기록될 것이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이날 9페이지짜리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사인 훔치기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앞서 이 조사를 "리그 사무국이 실시한 조사 중 가장 철저한 조사"라고 표현했다. 23명의 전현직 휴스턴 선수를 비롯한 68명의 목격자를 조사했고 수천 통의 이메일과 문자, 비디오, 사진 등을 분석했다.
그가 공개한 장문의 보고서 내용을 정리해봤다. 이것이 휴스턴 '사인 스캔들'의 실체다.
↑ 2017년 휴스턴 벤치코치였던 알렉스 코라는 사인 훔치기를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AFPBBNews = News1 |
포스트시즌도 훔쳤다
조사 결과, 휴스턴은 2017년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그리고 2018년 정규시즌에 전자장비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를 시도했다. 휴스턴은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은 먼저 리플레이 분석실의 화면을 이용해 사인을 훔쳤다. 리플레이 담당 직원이 리플레이 화면을 이용해 상대의 사인을 훔쳐 이를 더그아웃에 전달했고, 더그아웃에서 2루 주자에게 전달했다.
이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같은 해 사용하다 리그 사무국에 적발된 방식이기도 하다. 벤치에 있는 구단 직원이 착용한 스마트 워치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더그아웃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정보를 얻기도 했다. 더그아웃과 리플레이 분석실은 비디오 판독 요청에 도움을 얻기 위해 전화로 연결돼 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한 발 더 나간 것이 현지 언론을 통해 폭로된 방식이다. 당시 팀의 지명타자였던 카를로스 벨트란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새로운 방식을 논의했고, 더그아웃 뒤편에 모니터를 설치하자고 논의했다. 당시 벤치 코치였던 알렉스 코라가 직접 행동에 나섰다.
메이저리그는 선수 육성에 활용할 목적으로 중견수 방향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휴스턴은 이 카메라를 엉뚱한 용도로 활용한 것. 휴스턴 선수들은 화면을 보면서 사인을 해석하고, 타자에게 이를 전달했다. 박수, 휘슬, 소리 지르기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다 쓰레기통을 두들기는 것을 택했다. 변화구면 두들기고 패스트볼이면 두들기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2017년 8월 보스턴이 카메라로 사인을 훔쳐 주자에게 전달하다 스마트 워치가 발각되며 들켰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후 9월 각 구단에 공문을 보내 추후 강력한 징계를 예고했다. 휴스턴은 이러한 경고에도 사인 훔치기를 포스트시즌까지 계속했다. 이번에 징계가 강해진 가장 큰 이유다.
2018년에는 쓰레기통을 두드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리플레이 분석실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같은 노력은 2018시즌 도중 중단됐다. 선수들 사이에 효과가 별로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며 조용히 사라진 것. 그 이후에는 위반 사항이 없었다는 것이 리그 사무국의 설명이다.
손놓은 단장과 감독
당시 휴스턴 선수들 중 대부분의 야수들은 이같은 속임수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같은 행동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 팀에게 들킬까봐 걱정하고 있었고, 대니 파쿠아(당시 화이트삭스)처럼 눈치를 챈 선수들도 있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모니터를 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벨트란을 비롯한 당시 선수들은 징계 대상에서 제외됐다.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2017년 구단들에 주의를 줬을 때 단장, 감독의 책임을 분명히 명시했고, 선수들 대부분이 이 행위에 대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책임 정도를 일일히 따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대신 A.J. 힌치 감독과 제프 루노우 단장만이 징계를 받았다.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1년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고 애스트로스 구단으로부터 해고됐다.
힌치나 루노우가 사인 훔치기를 직접 지시하거나 지휘한 것은 아니다. 힌치는 오히려 이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징계를 받은 것은 이들이 선수단과 프런트 관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 휴스턴 선수단 운영을 책임진 힌치 감독과 루노우 단장은 사인 훔치기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막지도 않았다.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진=ⓒAFPBBNews = News1 |
감독 입장에서 선수단 전체에 만연한 불법 행위를 막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힌치가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없었다면, 최소한 루노우 단장에게 가지고 갔어야한다"고 지적했다.
루노우 단장은 이같은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리그 사무국은 이메일 조사 등을 통해 "그가 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소 두 통의 이메일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가 언급된 것이 확인됐기 때문. 선수와 구단 직원들이 규정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확인하는 것은 단장의 일이다. 심지어 리그 사무국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다.
결과 지상주의가 빚은 참사
루노우 단장이 이끄는 애스트로스 구단은 여러 분야에서 잡음이 많았다. 지난 시즌 도중 팀의 우완 선발 저스틴 벌랜더가 특정 기자의 클럽하우스 출입을 금지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브랜든 타우브먼 부단장은 챔피언십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가정폭력 전과가 있는 로베르토 오스나를 영입한 것을 비판해 온 여기자를 향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다가 물의를 일으키고 해고됐다. 이 과정에서 이를 폭로한 보도에 대해 '부정확한 보도'라고 반박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만프레드 커미셔너도 특별히 이에 대해 언급했다. "루노우는 분석을 활용, 리빌딩에 성공하며 이 분야에서 업계 리더로 꼽혀왔다"고 운을 뗀 커미셔너는 "그럼에도 프런트의 문화, 직원들을 대하는 자세, 다른 팀과의 관계, 언론 등 외부 이해당사자와의 관계와 관련해 문제가 많았다"며 애스트로스 구단의 문화에 대해 지적했다.
이번 사인 스캔들도 그러한 문화가 빚어낸 참사다. 단장이나 감독이 충분히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조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을 놓고 있었다. 당장의 성과에 취한 것이다. 만프레드는 "다른 무엇보다 결과에 가치를 두고 보상하는 편협된 문화가 개인에 대한 방향성 제시와 충분한 관리 감독이 부재된 상황과 결합되면서 지금 이 상황까지 이어졌다"고 꼬집었다.
이번 사인 스캔들과 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타우브먼 부단장에게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내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짐 크레인 애스트로스 구단주는 메이저리그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뒤 힌치 감독과 루노우 단장을 해고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명성에 흠집이 갔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말에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페이오프피치(payoff pitch)는 투수가 3볼 2스트라이크 풀카운트에서 던지는 공을 말한다. 번역하자면 ’결정구’ 정도 되겠다. 이 공은 묵직한 직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예리한 변화구가 될 수도 있다. 이 칼럼은 그런 글이다. greatnemo@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