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항상 성당에서 나올 때면 계단에서 기다리던 나를 보고 울었습니다. 그냥 넘어졌다고 하면서요. 그러고는 성당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10년전 돌아가실 때까지도요."
네덜란드계 캐나다 여성이 2차대전 당시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를 강요받은 사실을 공개했다고 19일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이 매체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테아 비젠버거 반 데르 왈(71)이 미국 워싱턴 비영리 연구단체인 아시아 폴리시 포인트(APP)의 민디 코틀러 소장에게 보낸 이메일 서한을 인용해 일본군 위안부 운영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보여준다고 전했다.
1941년 인도네시아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은 자신들의 승리를 과시하고 점령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주려고 강간을 했다"며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의 문틸란(Moentilan)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어머니와 이모도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고 폭로했다.
그는 "어머니와 이모는 10년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신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알리지 않았다"며 "어머니와 이모로부터 유일하게 이사실을 전해들었던 막내 이모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2009년 나에게 이를 털어놨다"고 설명했다.
그는 "1941년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축복받은 가정이었고 어머니는 너무나도 행복했다"며 "그러나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침략하면서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고 밝혔다.
그는 "아버지는 당시 악명높은 버마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26살의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어머니와 이모는 아이들과 함께 철조망이 뒤엉킨 수용소에 갇혔다"며 "매일 같이 굶고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1944년 1월25일 일본군 헌병대는 수용소에 있던 어리고 젊은 여성들을 골라 인근 성 사비에르 성당으로 끌고 갔다"며 "수용소 지도자들과 의사가 (전쟁포로와 부상자, 민간인 등을 보호하도록 한) 제네바 국제협약 위반이라고 항거했지만 무시당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어 "헌병대가 성당 안에서 여성들을 조사한 뒤 성당 밖에 있던 버스로 끌고나가자 폭동이 일어났다"며 "수용소에 있던 여성들이 흙과 돌을 헌병대에게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고 헌병대는 칼로 비무장 상태의 여성들과 아이들을 베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흘 뒤인 1월28일 되돌아온 여성들은 다시 자바주의 마겔랑이라는 곳으로 끌려가 비극적인 생활을 이어갔다"며 "이모는 수용소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전쟁이 끝났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며 "어머니는 전쟁 이후 계속 악몽을 꾸었고 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 사실을 폭로했던 네덜란드계 호주인인 오헤른(91)도 비슷한 수용소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머니와 이모는 부끄러워했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며 "나는 이 같은 사실을 캐나다 언론에 알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월8일 네덜란드 헤이그로 건너가 비정부기구(NGO)인 '일본명예부채재단'(Foundation of Japanese Honorary Debts)이 주 네덜란드 일본 대사관 앞에서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특히 집회 현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위안부로 살아야
네덜란드 정부는 1994년 조사에서 문서로 입증된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 피해자가 65명에 달한다고 밝혔으며 네덜란드 하원과 시민단체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매경닷컴 속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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